1. 역사 / 2. 경제 / 3. 정치 / 4.사회 / 5. 윤리 : 채사장님 글에 첨언하거나, 요약한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구입해서 정독 바랍니다.
5. 윤리
1) 우리를 시험에 빠트리는 윤리적 상황 : 윤리적 판단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대서양을 지나던 거대한 배가 침몰했다. 얼음장 같은 바다에 배는 점점 가라 앉고 있다. 구명보트 정원은 10명인데 탑승객은 11명이다. 그런데 11명 중 당신이 타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들은 제비뽑기를 했고 가장 긴 끈을 뽑은 사람이 희생양이 되기로 했다. 결국 누군가 긴 끈을 뽑았고 그는 처자식이 있다고 하며 희생양이 되길 거부했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희생양이 되길 강요할 것인가? 아니면 집단을 회유시켜 그 사람을 태우고 본인이 희생할 것인가? 모든 윤리적 판단에 앞서 고려해야 할 것은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에 대한 시점이다. 왜냐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신이 문제의 당사자일 때와 제3자의 입장일 때 종종 다른 판단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며,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는 가장 관대하다. 그러므로 보편적인 윤리 담론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위치를 사건과 분리해야 한다. 즉, 우리는 윤리 파트의 모든 돈의에서 해당 사건에 포함되지 않는 제3자의 입장을 전제로 한다.
2) 윤리의 정의 : 윤리적 판단은 실제 세계와 무관하게 존재한다. 윤리란 인륜륜(倫)에 다스릴리(理) 로 인간이 사는데 지켜야 하는 질서 혹은 도리를 말한다. 비슷한 말로 도덕이 있는데 왠지 도덕은 실천적인 느낌이 강하고, 윤리는 이론적인 느낌이 강하다. 구분해서 말하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합의하고 암묵적으로 준수하는 규범이나 규칙을 도덕이라 하고, 그런 규범과 규칙이 정당한지 의심하고 검토하는 것을 윤리라고 할 수 있다. 윤리는 당위적 명제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명제부터 무엇인지 알아보자. 명제란 사전적 의미로는 어떤 내용이 참인지 거짓인지 명확하게 판별할 수 있는 문장이나 식을 말한다. 그리고 명제는 둘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사실명제와 당위명제인데, 사실명제는 사실을 묘사하거나 서술하는 명제로 객관적 사실이나 과학적 역사적 사실을 진술하는 명제이다. 당위명제란 사전적 의미로는 마땅할 당(當)에할 위(爲)로 마땅히 해야 할 것으로 표현된다. 이어 당위명제는 마땅히 해야 하는 명제로 ~~ 이어야 한다로 끝나는 문장은 당위명제다.
예를 들면 '사과는 맛있다'는 명제는 직접 먹어보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있지만, '사과는 맛있어야 한다' 라는 명제는 참이나 거짓으로 말할 수 없다. 즉, 당위명제는 참과 거짓의 판단을 넘어서 있고 이에 따라 윤리적 명제 역시 침과 거짓으로 말할 수 없다. 사실명제나 당위명제는 성격이 너무나 달라서 각각 독립적인 세계에 존재한다.
사실명제에서 당위명제가 도출되거나, 반대로 당위명제에서 사실명제가 도출되는 일은 없다. 그런데 쉽게 오류에 빠진다. 예를들어 "자유주의가 세계적 대세이므로 우리도 자유주의를 추구해야 한다." 이 문장은 두 가지 명제로 되어 있다. 자유주의가 세계적으로 대세다. 자유주의를 추구해야 한다. 두 문장인데 두 번째 문장은 주장이고 첫 번째 문장은 근거다. 타당한 형식을 하고 있는 듯 하지만 실제로 두번째 문장에서 첫번째 문장이 도출되지 않는다. 즉, 모든 국가가 자유주의를 선택했다고 해서(사실) 우리도 자유주의를 선택해야 하는 것(당위)은 아니다. 또하나 예를 들어보자 침몰하는 배에서 누군가 이렇게 말을 했다. "윤리라는 건 아무리 어렵고 힘든 특수한 상황에서도 지켜질 때에야 비로소 그 가치를 갖는거요." 이 문장은 윤리의 대산이 당위명제에 국한되고, 또 이 당위명제가 현실을 기술하는 사실명제와 무관하다고 할 때, 그의 말은 윤리의 속성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3) 의무론과 목적론 : 주어진 의무를 고려할 것인가, 미래의 결과를 고려할 것인가, 윤리라는 분야를 이분법으로 쪼개 보면 의무론과 목적론으로 나눌 수 있다. 윤리의 의무론은 도덕 법칙이나 의무를 준수하는 행위가 윤리라고 보고, 윤리에서 목적론이란 다수의 이익을 창출하는 행위가 윤리라고 본다. 의미론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대표적인 사람들은 종교인이다. 그들은 이미 주어진 종교의 교리와 주어진 도덕적 명령으로서 신의 말씀을 규범으로 생각하고 평생 이를 지키며 살아간다. 종교인들에게 옳은 일이란 신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고 잘못된 일이란 신의 말씀을 거역하며 사는 것이다.
반면 목적론적 윤리관의 모습은 안중근 의사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람을 죽이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일이야." 같은 생각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민족의 해방과 독립이라는 좋은 결과를 위해서 총을 쏜 것이다. 이는 좋은 결과를 고려한 것이므로 목적론적 윤리관에 따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의무론과 목적론을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선 시간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특정 행위를 하려 할 때, 당신은 과거와 미래를 고려하게 된다. 우선 과거에서부터 주어져 있는 의무를 고려해서 현재 행동할 수 있다. 이것은 의무론적 태도가 된다. 다음으로 미래에 발생할 결과를 고려해서 현재 행동할 수도 있다. 이것은 목적론적 태도가 된다. 결과를 고려한다는 점에서 목적론을 결과주의라고도 부른다.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 다는 점은 의무론을 비결과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자신이 그렇게 살아가는지를 스스로 인지하는가의 여부와 무관하게 평생을 의무론적 윤리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평생을 목적론적 윤리관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현대의 개인주의적이고 경쟁적인 신자유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목적론자들이다. 우리는 어떤 행위를 할 때, 그것이 나와 집단의 미래에 이익이 될 것인가를 고려해서 행동한다.
4) 의무론과 정언명법 : 절대적인 도덕 법칙을 찾아라, 의무론을 대표하는 철학자는 그 유명한 칸트다. 칸트는 학문에서 중간보스급되는 인물로 문학, 철학, 예술 등 인문학의 어떤 분야든 깊이 있게 파고 들면 결국 그를 만나게 된다. 어렵게 중간보스를 물리치고 나면 마지막 끝판왕으로 삼 형제가 기다리고 있는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다.
칸트는 18세기 사람으로 250년 전 독일에서 활동했다.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의 비판 시리즈로 유명하다. 비판은 대상의 한계를 밝힌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 대상의 활동 범위가 어디까지 인지 그 범위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은 순수이성에 대한 한계를 밝힌다는 뜻이다. 순수이성이 인간의 감각, 지각, 지성 능력인 인식 능력을 말하므로 이를 비판한다는 것은 인간의 인식 능력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천이성은 인간 행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 능력을 말하는데 실천이성비판은 윤리가 무엇이고 어떻게 가능한지 보여준다. 판단력비판은 아름다움에 대한 것으로 미학을 제시한다. 이 책에서는 의무론적 윤리설이 칸트 실천이성비판의 핵심적 논지가 된다. 그리고 칸트는 도덕 법칙들이 무너져가는 시대상에서 상대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철학 담론 속에서 절대적인 도덕 법칙을 찾아 세우려 노력했다. 절대적이고 누구나 따라야 하는 완벽한 도덕 법칙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렇게 절대적 도덕 법칙의 존재가 의심받는 상황 속에서 칸트가 제시한 것은 정언명법이었다. 이것은 누구나 반드시 따라야 하는 도덕 법칙이 무엇인지를 이성적으로 알려주는 방법으로서, 칸트가 제안했다. 정언명법이란 절대적이고 보편적이어서 누구나 따라야 하는 도덕 법칙을 찾아내는 계산 기계 정도로 볼 수 있다. 정언명법 기계에 내가 하려는 행위X를 넣어본다. 그러면 계산을 거쳐 이 행위가 보편적 도덕에 해당하는지 구별해준다. 작동방식은 단순해서 내가 행위X를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을 사회 구성원 모두가 동시에 한다고 했을 때의 결과를 예측해 보는 것이다. 그 결과 그래도 사회가 붕괴하지 않는다면 행위X는 보편적 도덕성을 띤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거짓말하는 행위를 넣었을 때와 쓰레기를 줍는 행위를 넣었을 때 사회가 어떻게 되는지 상상해보면 바로 정언명법의 진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5) 목적론과 공리주의 :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구하라. 목적론적 윤리설을 대표하는 입장은 공리주의다. 19세기 무렵에 영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윤리적 견해로, 벤담과 밀이 대표적이다. 단적으로 윤리의 궁극적인 목표로 개인과 사회의 이익(쾌락,행복)에 초점을 맞춘 사상이다. 공리주의의 모토는 너무도 유명한 최대다수 최대행복 으로 이 말은 공리주의의 핵심 논점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한마디로 윤리적인 것이란 가장 많은 사람에게 가장 행복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단순하고 명쾌한 공리주의의 정신을 가장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인물은 벤담이다. 그는 모든 행위의 시비는 사람의 행복을 증진하는지의 여부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벤담의 공리주의를 양적 공리주의라고 하고, 밀의 질적 공리주의와 구분하기도 한다. 벤담과 밀은 최대다수 최대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로서 차이를 갖는다. 벤담은 행복을 양적 측정할 수 있다고 보았고, 밀은 행복의 질적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침몰하는 배의 사례를 들어보자. 11명중 한 명이 희생되어야 다른 10명이 구명정에 안전하게 탑승이 가능하다. 제비뽑기를 했는데 A라는 사람이 걸렸다.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A는 -1의 행복을 가지고 나머지 10명은 +1의 행복을 가진다. 총합은 9이므로 0보다 크므로 행복한 결과를 맺기 때문에 A가 희생되어야 하는 건 당연하다는 결과가 나온다. 그런데, 밀의 질적 공리주의의 입장으로 다시 생각해보면, 개인의 행복도는 모두 1로 동일하지 않고 사람마다 편차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A를 제외한 나머지 10명의 행복도의 합은 1에서 9까지 다양하게 나왔다고 A의 행복도는 -20000이라면 총합이 마이너스이므로 질적으로 매우 불량해진다는 결과가 나온다. 질적 행복의 합이 마이너스이므로 A가 희생되는 것은 비윤리적이라는 결과에 도달한다.
6) 하이에크와 롤스 : 어떤 사회가 윤리적인가, 윤리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어떻게 하면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궁극적으로 사회를 변모시킬 힘을 가진 것은 결국 세금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세금을 올리거나 낮추는 것은 사회 전체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다. 방향을 선택하기 위해선 우리의 상태부터 점검해봐야 한다. 여러 참고 지표가 있겠지만, 세금과 복지에 밀접한 관련이 있고 현실을 가장 정확히 보여주는 지표는 빈부격차 지표다. 빈부격차의 문제는 선인과 악인에 의한 문제가 아니다. 빈부격차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이러한 빈부격차를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볼 것인지 아니면 해결할 필요가 없는 문제로 볼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뿐이다.
어떤 이들은 빈부격차가 부당하므로 세금을 적극적으로 징수해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윤리적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다른 이들은 자유 시장에서 자신의 노력과 능력 그리고 자유로운 선택으로 부를 얻었다면 그러한 부는 부당하지 않으며 사회가 인정해줘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차라리 정부에 의한 강제적인 세금 징수가 더 비윤리적이라고 말이다.
이런 상반된 주장을 했던 두 인물인 하이에크와 롤스에 대해서 알아보고 이들을 의무론과 목적론의 입장에서 평가해보자. 우선 하이에크는 20세기 영국에서 활동한 경제학자로, 신자유주의 사상적 아버지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는 정부주도의 계획 경제를 강력히 비판하고 자유시장을 옹호했다. 하이에크는 시장에서의 경쟁을 하나의 게임으로 생각했다. 지식이나 기술이 각기 다른 게임의 참가자들이 정당한 규칙 아래서 경쟁하고 그럼으로써 승자와 패자가 생겼다면, 그 결과는 정당했다는 것이 그의 기본 전제였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게임이 공정했는지, 혹시나 게임 참가자 중 누군가를 속인 사람은 없었는지 감시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게임의 결과가 평등해야 한다며 정부가 나서서 게임의 판을 망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한 학급에서 A, B, C, D 네 명이 있는데 수학 시험을 앞두고 열심히 공부한 A를 제외한 나머지 B, C, D는 놀기 한창이다. 결과는 각각 A 100점, B 30점, C 40점, D 50점을 받았다. 그런데 선생님이 오셔서 A한테 나머지 학생들에게 10점씩 나누어줘도 너가 70점으로 1등이니 나누어주자고 말한다. 선생님의 행동은 정의로운가? 공정한 기회와 절차가 보장되어 있다면 결과가 아무리 큰 격차를 발생시켰다 할지라도 그 성과를 보장해주는 사회가 윤리적이고 정의로운 사회인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결과를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이나 절차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의무론적 윤리설에 가깝다. 이에 따르면 사회에서 발생한 빈부격차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게임에 대한 정당한 대가다. 그렇기에 윤리적인 사회를 만들겠다며 세금을 늘리는 행위는 어불성설이 된다. 사회에서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고 있는지, 절차가 준수되고 있는지, 위법행위는 없는지를 국가가 감시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이와 대비되는 롤스의 생각을 들어보자. 롤스는 하이에크과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 활동한 철학자로, 대표 저서로 정의론이 있다. 그는 세금을 높일 것인지 낮출 것인지 재분배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합리적 판단을 위해 하나의 사유 실험을 제안했다. 그리고 이를 원초적 입장이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X, Y, Z 씨는 지금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 말도 할 수있고 합리적 판단도 할 수 있는 상태지만, 다만 자기가 누구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등 과거에 대한 기억을 잃었다. 다행인 것은 이 기억은 정확히 1시간 후에 완벽하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 명 중 한 명은 일론 머스크이고, 다른 한 명은 평범한 중산층이며, 마지막 한 명은 노숙자다. X, Y, Z는 지금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자신이 셋 중 한 명일 것임을 알고 있다. 기억이 돌아오기 전에 롤스가 이들에게 물었다. "이제 두 가지 중에 하나의 분배 방식을 선택하려 합니다. 첫번째는 세금을 낮추고 복지도 낮춰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세금을 높이고 복지도 높여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최소수혜자에게 혜택을 주는 것입니다. 어떤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당신이 X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롤스에 따르면 세명 모두 두 번째 분배 방식인 세금 인상과 복지 확대에 동의할 것이라 한다. 왜냐면 자신이 노숙자가 될 것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일론 머스크여서 얻는 이익보다 노숙사일 때 처할 어려움에 더 마음이 쓰이는 것이다. 롤스의 원초적 입장에 대한 사유 실험은 우리가 개인의 특수한 상황을 벗어났을 때, 사회 전체가 합리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분배 방식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롤스의 생각은 개인의 절대적 권리에 대한 고려보다 결과적으로 다수가 합의할 수 있는 상황을 기준으로 한다는 점에서 목적론적 윤리설의 입장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정의롭고 윤리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면 개개인이 납득하고 합의할 수 있는 결과를 고려해서, 국가가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해서 부를 재분배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의무론자는 결과에 인위적으로 개입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강제보다는 과정과 절차에 대한 감시를 통해 공정한 게임이 가능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목적론자는 절차나 과정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결과를 도출해서 문제를 해결행 한다고 주장했다. 당신의 생각에는 어떤 것이 더 정의롭고 윤리적인 방향이라고 생각되는가? 여기에 옳고 그름은 없다.
* 최종 정리
윤리 절대주의로서의 의무론은 칸트에 의해서 주장되었으며 절대적인 도덕 법칙을 찾아 이를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 반면 윤리 상대주의로서의 목적론은 공리주의자들이 제시했는데, 절대적인 도덕 법칙의 허구성을 밝히고 행위의 결과가 행복과 쾌감이라는 이익을 창출할 때 윤리가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현실적인 측면에서의 윤리는 사회 정의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이는 단적으로 빈부격차의 문제, 즉 세금과 복지의 문제가 연결되어 있었다. 두 가지 견해가 있었는데, 개인의 절대적 권리로서의 재산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론적 견해와 반대로 복지를 통해 증진될 사회의 행복을 고려해서 부유층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옳다는 목적론적 견해가 그것이다. 이 논의가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우리가 앞서 여행했던 경제, 정치, 사회의 쟁점들을 종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에서의 세금과 복지 문제, 정치에서의 누구의 이익을 대변할 것인가의 문제, 사회에서의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쟁점이 현실에서의 윤리적 판단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 에필로그
지대넓얕1에서는 역사, 경제, 정치, 사회, 윤리의 다섯 영역을 탐험했다. 이 다섯 영역은 각각 현실의 모습을 보여주는 안경으로 우리에게 세계를 이해하는 틀을 제시해주었다. 중요한 것은 이 영역들이 독립되어 있지 않다는데 있다. 이들은 연결되어 있으며 핵심 논지에서 공통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 그 구조란 이분화된 세계다. 소수의 지배자와 다수의 피지배자의 입장으로 구조화 해서 정리해보자.
역사에서 소수의 지배자는 왕, 영주, 부르주아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생산수단을 공유함으로써 노예, 농노, 프롤레타리아를 지배하고 권력을 유지해왔다. 특히 근대의 부르주아는 생산수단으로 공장과 자본을 소유함으로서 자본주의 시장에 공급 과잉 문제를 촉발했으며 이는 두 번의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현대에 들어서며 냉전과 신자유주의가 도래했다.
경제에서 초기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는 부르주아의 세계이다. 그들은 시장의 자유를 추구하고 정부의 개입을 반대했다. 이에 따라 세금 인하와 복지 축소가 진행된다. 세금 인하와 규제 완화는 부르주아에게 직접적인 이익이 된다. 자본가의 투자 확대와 사회의 경쟁적인 분위기는 경제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정치에서는 보수는 자본가와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적 입장을 갖는다. 생산수단의 민영화, 정부 개입 축소, 세금 인하 및 규제 완화, 경제 성장이 이들의 지향점이다. 정치적 의사 결정에서 자본가는 소수이기 때문에 민주주의 체제보다는 독제나 엘리트주의 체제가 이들의 이익을 보장하는데 더 효과적이다.
사회에서 자본가가 소수라는 특징은 이들의 권리가 노동자 다수에 의해 침해받을 가능성을 발생시킨다. 전체주의로부터 개인을 보고하는 근본 이념으로서의 자연권, 특히 재산권의 절대적 보장은 자본가의 권리와 재산을 보호해줄 근거를 마련한다. 또한 현실적인 측면에서 미디어는 기업의 광고비를 통해 유지된다는 특징 때문에 기업과 자본가의 이익을 지속적으로 대변할 수 밖에 없으며, 이로 인해 보수적 견해를 반영하기 좋은 조건에 놓였다.
윤리에서 의무론은 결과보다 이미 주어진 의무와 도덕 법칙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는 윤리관으로, 개인의 권리와 인권을 강조한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신자유주의는 공정한 경쟁이라는 절차가 보장된다면 그 결과로 빈부격차가 발생하는 것은 무시한다. 결과가 아닌 절차나 과정의 공정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의무론적 윤리설이 신자유주의 정당성에 대한 윤리적 근거를 제시하기에 적합하다.
다음으로 다수의 피지배자의 입장에서 보자. 역사에서 그들은 노예, 농노, 프롤레타리다였다. 이들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했다. 특히 근현대 역사에서 이들은 자신이 착취당하는 상황을 직시하기 시작했고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 역사의 주인공으로 서려했다. 그러나 냉전 이후 공산주의 붕괴와 함께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노동자의 계급을 유지하게 되었다.
경제에서 후기 자본주의, 사회민주주의 공산주의는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체제다. 이 체제들은 공통적으로 시장의 자유를 축소하고 정부의 개입을 강화하려 한다. 이에 따라 세금이 인상되고 복지가 확대된다. 정부에 의한 적극적인 복지 정책 추진은 노동자와 서민에게 직접적인 이익이 되고 동시에 빈부격차를 완화한다. 다만 노동 의욕 감소와 자본가의 투자 의욕 감소가 장기적인 경기침체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비판받아왔다.
정치에서 진보는 이러한 노동자, 저소득자, 서민, 최소수혜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적 입장을 말한다. 생산수단 국유화, 정부 개입 확대, 세금 인상 및 규제 강화, 사회적 재분배가 이들이 지향하는 방향이다. 노동자가 다수이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이들의 이익을 직접적으로 대변할 수 있는 정치체제가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역사적 경험, 미디어에 의한 교육, 대중의 비합리성으로 노동자가 스스로의 이익과는 어긋나는 정치정당을 선택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사회에서 노동자가 다수라는 특징은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권리가 침해할 가능성을 발생시킨다. 이렇게 다수에 의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부정적 상황을 전체주의라고 한다. 근현대 시기에 전체주의가 얼마나 폭력적으로 개인의 가치를 희생시킬 수 있는지 경험한 인류는 전체주의를 부정적 개념으로 명확하게 규정했다. 이론적으로는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가 전체주의함으로써 자본가의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자본가의 이익이 정치적으로 강력하게 지지되고 있다.
윤리에서 목적론은 행위의 결과가 행복과 쾌락이라는 이익을 발생시킨다면 이 행위는 윤리적으로 평가하는 관점으로 전체의 이익을 강조한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후기 자본주의와 사회 민주주의의 재분배 중심 제도는 다수의 노동자와 서민의 만족을 높인다는 점에서 목적론적 윤리설에 의해 정당화된다.
1권에서는 세계를 양분함으로써 복잡한 현실 세계를 단순화 했다. 현실의 복잡성을 단순화한 이 책이 지적 대화를 위한 교양 여행의 안내서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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