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철학 / 2. 과학 / 3. 예술 / 4. 종교 / 5. 신비 : 채사장님 글에 첨언하거나, 요약한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구입해서 정독 바랍니다.
5. 신비
1) 마지막 여행, 신비 :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대화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현대 철학의 가장 중요한 인물중 한 명인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책 논리-철학 논고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선언하며 글을 마치고 있다. 여기서 그가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한 기준은 감각적 경험이 가능한지의 여부였다. 그는 언어가 세계를 묘사하는 그림이라고 생각했던 까닭에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지만, 경험할 수 없는 추상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종교적 가치나 윤리적 가치, 예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보여줄수 있을 뿐이지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과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지만,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아름다움은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개인의 심적 세계 내에서 보고 느껴야 하는 대상이다.
문제는 철학자들이 말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허황되게 말하기 시작하면서 번잡한 철학적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라고 한 그의 선언은 지금까지의 모든 철학적 문제를 끝낸 선언이었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그들은 실제로 증명할 수 있는 것들만이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 당시에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 철학 사조였다. 그들은 경험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명제들이 무의미하고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며 객관적인 근거만을 인정했는데, 그들이 생각하기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자신들의 이론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에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을 찾았을 때 그들은 실망하고 말았다. 왜냐면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이 할 수 있는 영역과 할 수 없는 영역을 분명히 함으로써 철학의 문제들을 해결하려 했을 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신비한 것은 오히려 말할 수 없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종교적, 예술적, 도덕적 가치들은 철학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삶의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던 것이다. 예술의 아름다움이나 신앙의 경건함이나 삶의 의미나 죽음의 신비는 다른 누군가와 토론하거나 검증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도 그러했듯, 우리도 이미 알고 있다. 이 말할 수 없는 것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못했던 예술과 종교와 삶과 죽음에 대한 주관적 체험은 나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하고 심오한 문제라는 것을 말이다. 마지막 여행지는 반드시 혼자 깨닫고 이해해야만 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체험에 대한 이야기로 향한다. 지금부터 삶과 죽음이라는 주관적 신비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2) 죽음의 순간 : 임사체험에 대한 연구와 철학적 입장, 임사체험은 Near Death Experience의 앞자를 따 NDE라고도 한다. 사전적 정의는 의학적 기준으로 죽음에 이르렀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이후 특수한 체험을 기억하는 현상을 말한다. 임사체험의 기록은 중세부터 시작되지만 오늘날에서야 의학기술의 발달로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임사체험의 연구는 미국에서 가장 활발하며, 영국, 인도, 일본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이 연구에 선구적 역할로 레이먼드 무디와 제프리 롱 등이 있다. 임사체험에는 몇가지 공통된 패턴이 보이는데 몸밖에서 자신을 보는 체외 이탈 경험, 빛의 터널을 통과하는 경험, 평온함을 느끼거나 지각의 확대, 귀에서 윙윙 거리는 소리, 죽은 지인과의 만남, 인생의 회고, 경계지점에서의 회귀 등이다. 이러한 체험은 문화, 지역, 인종, 종교와는 무관하게 보편의 구조를 갖는 것이 특징이다. 특이한 점은 대부분의 임사체험자들이 기존에 갖고 있던 종교적 신념을 임사체험과 연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이 기존에 갖고 있던 특정 종교의 입장을 떠나 보편적인 종교적 성찰로 관심이 확대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외에도 체험자들은 일상생활에서의 변화도 느끼는데, 주변환경과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증가했고, 지식에 대한 욕구가 늘어났으며,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극복되었다고 한다.
임사체험 연구는 주관적 체험에 대한 연구라서 객관적 데이터를 확보하기 어렵고 체험자 인터뷰 중심으로 질적 연구를 수행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수많은 데이터가 쌓인다 해도 직접적인 증거를 제시하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존재한다. 임사체험에 대한 연구만큼 비판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반론이 뇌이상설이다. 이는 죽음이 임박한 당시의 신체 변화가 뇌에 비일상적인 영향을 주어 환각으로서의 경험을 일으킨다는 설명이다. 세부적으로는 호르몬설과 산소결핍설이 있다. 호르몬설은 죽음이 임박했을 때 진통작용을 하는 엔돌핀의 과다 분비가 환각의 원인이라는 설명이다. 임사체험중 느끼는 평온함과 안락함이 이에 대한 근거로 제시된다. 산소결핍설은 심장정지로 뇌 안의 산소 부족이 환각의 원인이 된다는 설명이다. 산소 농도가 저하되면 시각 뉴런의 활동이 증가하여 빛을 보는 듯한 경험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이와 비슷하게 혈류 중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높아져 환상을 보는 것이란 설명도 있다. 이 밖에도 임사체험을 수면의 단계와 연결하는 설명이나, 측두엽의 이상과 연결을 설명 등 뇌 활동의 일부로 설명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임사체험에 대한 논쟁은 궁극적으로 두 가지 철학적 입장 위에서 전개된다. 그것은 물질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정신이나 영혼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 따라 나뉜다. 영혼과 마음이 물질로서의 뇌와 독립해서 존재할 수 있는가? 어떤 이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질 세계에 존재하는 신체와 뇌는 원인과 결과에 의한 인과법칙에 종속되어 있지만, 우리의 정신과 영혼은 인과법칙을 벗어나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TV수상기로 비유해볼 수 있다. 뇌와 신체는 TV이고 정신은 전파처럼 존재한다는 비유다. 이에 따르면 TV와 전파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독립된 실체인 것처럼, 뇌와 전신도 독립된 두 실체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물질과 마음을 두 가지 근원으로 구분한다는 의미에서 '물심이원론'이라고 한다.
반면 다른 이들은 정신이나 영혼이 단지 허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영혼은 존재하지 않고, 정신 역시 다만 뇌가 만들어내는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증기기관차로 비유해 볼 수 있다. 정신은 증기기관차가 뿜어내는 연기와 유사하다. 연기는 증기기관차의 부산물일 뿐, 열차를 실제로 움직이게 하는 실체가 아니다. 만약 증기기관차의 원리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밖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굴뚝에서 연기가 많이 나오면 빨리 달리고, 연기가 적게 나오면 천천히 달리니까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연기가 아무 쓸모 없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도 물리적 뇌 활동의 부산물로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정신을 물질로 환원해 물질의 존재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물심일원론'이라고 한다. 임사체험과 관련해서 물심이원론은 정신을 독립된 존재로서 인정하므로 임사체험이 신체적 죽음 이후 경험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기억과 인지 활동은 물질적인 뇌뿐만 아니라 독립된 정신에 의해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면 물심일원론과 유물론의 관점에서 임사체험은 완벽하게 뇌이상설로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이 된다. 이에 따르면 뇌를 넘어선 기억이나 인지는 불가능한 일이다.
임사체험에 대한 연구와 비판은 현재 진행중이며, 연구의 시작이 비교적 최근이라는 점에 비추어보면 앞으로도 더 심도 있는 탐구와 과학적 비판이 추가될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임사체험이 제3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체험자의 주관적인 경험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3) 죽음 이후 : 죽음 이후의 네 가지 가능성,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시간의 형태를 기준으로 고려할 때, 죽음 이후의 가능성은 몇가지로 제한된다.
가능성 1 무 : 첫 번째 가능성은 죽음이 시간에서 완전한 끝이라는 관점이다. 죽음 이후 나의 정신과 의식은 완전히 소멸하고 전등의 불이 나가듯 갑자기 완벽한 무의 상태가 찾아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 물질문명 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와 같은 가능성은 유물론적 세계관을 전제로 하고 있다. 유물론에 따르면 신체와 독립된 영혼은 존재하지 않고, 정신이란 다만 뇌의 물질적 조건이 충족되어 결과적으로 발현된 현상일 뿐이다. 따라서 만약 죽음과 함께 물질적 조건이 와해된다면 그 결과로서의 정신도 와해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관점은 영원한 사후 세계나 반복되는 윤회와 같은 종교적 견해를 부정하는 논지로 흔히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유물론적 관점이 사후 세계와 윤회를 부정하는 논지로서는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나의 장신이나 의식이 물질적 조건이 충족될 때 발현되는 것이라면 내가 죽은 후에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특정한 물질적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필연적으로 나의 정신과 의식이 반복해서 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의식은 휘발성이기 때문에 사후 소멸된다. 다시 물질적 조건이 충족된다고 해서 다시 의식이 발현되거나 기억이 재생되지 않는다.)
가능성 2 영생 : 두 번째 가능성은 죽음 이후에도 삶의 시간이 계속된다는 관점이다. 신체적 죽음과는 무관하게 영혼이나 정신은 소멸하지 않고 특정 체험을 계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매우 친숙한데, 대표적으로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절대적 유일신교가 가지고 있는 사후관이다. 죽은 후에 천국에 갈 수도 있고 지옥에 갈 수도 있고 구천을 떠돌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새로운 경험이 발생하고 시간의 관점에서는 단절이 없는 흐름이 지속된다. 이러한 사후관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물질과 정신이 각각 독립된 실체라는 물심이원론의 관점이 전제되어야 한다. 실체와 독립된 개별자로서의 영혼이 실재해야만 육신 죽음 이후에도 내 시간이 계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능성 3 윤회 : 세 번째 가능성은 죽음 이후에 시간이 되돌아온다는 견해다. 탄생, 성장, 노년, 죽음이 다시 반복되는 것이다. 이 상대적 다신교인 베다, 힌두교,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입장이다.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거나 가축으로 태어날 수도 있지만 시간의 관점에서는 시간이 돌고 돈다. 이러한 윤회의 가능성은 일반적으로 신체와 독립된 정신을 인정하는 물심이원론의 관점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독립된 정신을 인정하지 않는 유물론의 입장에서도 윤회를 설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영혼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윤회는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물심이원론의 입장에서 신체와 독립된 영적 존재가 있다고 가정해본다. 그러면 윤회란 영적 존재가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갈아입듯 낡은 신체를 버리고 새로운 신체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물질로서의 육체는 변하고 죽지만, 변하지 않고 죽지 않는 비물질적 존재로서 윤회하는 주체를 상대적 다신교에서는 아트만이라고 한다. 특히 베다와 우파니샤드, 이를 계승한 브라만교와 힌두교에서 불변하는 본질적 실체로서의 아트만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러면 불멸하는 영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윤회는 불가능한가? 그렇지도 않다. 실제로 윤회를 인정하는 불교에서는 베다와 힌두교와는 달리 고정된 실체로서의 아트만을 인정하지 않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는 아트만이 없음을 의미한다. 영적 존재로서 아트만이 없는데 무엇이 어떻게 윤회를 한다는 말인가? 유물론적 관점에서 윤회를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윤회의 주체가 무엇인지 규정해야 한다. 윤회는 나의 의식이 반복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물질과 독립된 영혼이 없다고 가정해보자. 영혼이 없다고 해도 부정할 수 없이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은 세계를 보고 있는 나의 의식이다. 내가 세계를 보는 구심점으로서 의식적 존재라는 것은 나에게 매순간 확인되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엄밀히 말하면 타인에게도 나처럼 의식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타인에게도 의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타인의 행동을 통한 추측일 뿐, 내가 직접 타인의 의식 세계를 들여다보고 확인한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확신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은 내가 지금 세계를 경험하고 있는 의식적 존재라는 사실 뿐이다. 의식에 대한 문제는 매우 중요해서 세상의 진리를 찾아 헤매는 구도자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대면해야 할 주제지만 단순하게 정리하고 넘어가보자. 의식을 단지 눈앞의 세계를 구성하는 능력으로 규정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의식 능력은 어디서 기원하는가? 영혼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영혼에서 기원한다고 쉽게 설명할 것이다. 반면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유물론자들은 물질적인 뇌에서 발현된 현상이라고 설명할 것이다. 물질들이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다가 우연하게 지금 나의 뇌구조를 형성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나의 의식 능력으로 발현된 것이다. 어떤 물질적 구조가 타인의 의식 능력이 아니라 하필 나의 의식 능력으로 발현되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나의 의식 능력을 발현시키는 물질적 조건은 아주 작은 확률이 아니라 가능한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는 점은 확실하다. 왜냐면 너의 현재 뇌 구조와 유아기의 뇌구조는 물질적 측면에서 현저하게 다르겠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동일하게 나를 중심으로 세계를 구정하는 의식능력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이나 정체성이라는 이성적 능력에서는 차이가 있겠지만, 의식적 세계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유아기 때나 지금이나 정확하게 동일하다. 의식을 눈앞의 세계를 구성하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의식능력의 발현 조건을 넓은 스펙트럼 안에서의 물질적 구조의 충족으로 본다면, 이제 유물론의 측면에서 윤회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내가 죽은 이후, 즉 물질적 조건이 소멸하는 동시에 의식능력을 상실한 다음에 우주가 존재하는 동안 무한에 가까운 시간속에서 다시 우연적으로 물질적 조건이 대략 충족된다면 나의 의식능력이 발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의 뇌 구조는 생물학적 특성상 대체로 유사하므로, 과거 전체와 미래 전체의 인류의 뇌 구조의 다양성 안에서 지금 나의 뇌 구조가 유사하게 반복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 즉, 과거에도 미래에도 나의 의식능력은 반복적으로 출현했고, 출현할 것이다. 이러한 의식능력의 반복을 윤회라고 이름 붙인다면, 윤회는 독특한 사건이 아니라 우주의 일반적인 사건일 것이다.
붓다는 윤회에 대해 직접 언급을 피했으나, 윤회를 인정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동시에 절대적이고 고정적인 아트만을 부정했다. 이러한 측면을 모두 만족하는 설명은 물질적 조건의 형성과 와해에 따라 의식이 생겨나고 소멸한다는 유물론적 설명이 가장 적절해보인다.
가능성 4 영원회귀 : 시간의 단절로서의 무, 지속으로서의 영생, 반복으로서의 윤회는 일반적으로 죽음 이후의 가능성이다. 그런데 여기 잘 알려지지 않은 한 가지 가능성이 더 있다. 그것은 니체의 영원회귀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영원회귀의 개념을 처음 제안했는데, 이는 니체 사상의 핵심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영원회귀는 일단 윤회와 매우 비슷하지만 죽음 이후 다시 예전 삶이 반복된다고 본다. 차이점이 있다면 윤회는 전생의 과보에 따라 새로운 삶을 살게 되지만, 영원회귀는 죽음 이후에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닌, 내가 살아왔던 예전 삶을 정확히 다시 반복하게 된다. 시간과 공간의 변화없이 정확하게 동일한 삶의 영원한 반복이 영원회귀다. 영원회귀가 사실이라면 우리는 지금껏 살아온 삶을 죽음 이후 다시 그대로 반복해서 살아야 한다. 순간마다 느꼈던 감정을 다시 느끼고 겪었던 경험을 다시 겪으며 영원히 반복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니체가 이렇게 끔찍한 사후관을 우리에게 제시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니체가 우리를 그저 허무함에 빠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회귀의 개념이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돌아보기 만들기 때문이다. 영원회귀는 두 가지의 시간의 길이를 전도시킨다. 그것은 인생과 순간이다. 인간에게는 100년의 인생은 매우 긴 시간이지만, 지금 당장의 순간은 매우 짧은 시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짧은 순간을 소모하며 살아간다. 지금 이 순간은 중요하지 않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자신의 목표를 찍어두고 스스로를 그곳으로 내던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 주변을 돌아볼 시간도 없이 전력질주한다. 하지만 니체는 영원회귀를 통해 정말 중요한 것은 먼 미래의 보이지 않는 약속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임을 밝힌다. 영원회귀에 따르면 이 순간은 무한히 반복되는 삶 속에서 무한히 반복될 것이다. 그래서 이 순간의 길이는 삶이 무한히 반복되는 만큼 무한대로 길어진다. 반면 인생은 100년이라는 유한한 시간일 뿐이다. 이제 순간과 인생의 길이는 역전된다. 순간은 무한한 길이를 갖지만 인생은 유한한 길이로 한정된다. 순간은 영원한 선으로 길게 늘어서지만 인생은 짧은 선폭에 불과해진다. 만약 지금 이 순간이 고통스럽다면 이 고통은 영원할 것이다. 반대로 지금 이순간이 행복하다면 이 행복은 영원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영원히 반복될 이 순간을 위해 나는 내 삶을 창조해야만 한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을 해내야만 한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존재, 지금 이 순간을 소모하지 않고 최고로 가치있는 순간을 위해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이 존재가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다. 니체는 문학적으로만 영원회귀를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영원회귀가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 니체에 따르면 물질로만 구성된 이 우주는 끝도 없고 시작도 없이 무한한 시간 위에서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는 의미없는 세계다. 아주 무한히 길고 긴 시간동안 우주는 무한히 수죽과 팽창을 반복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지금의 우주와 동일한 초기 조건과 형태를 가진 모습으로 다시 탄생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정확하게 다시 살아낼 것이다.
물론 현대물리학 관점으로 보면 니체의 영원회귀는 과학적으로 문제가 있어보인다. 초기 조건의 미세한 차이만으로도 결과에 큰 차이가 발생한다는 카오스 이론이나, 확률에 의해 결정되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에 근거하면 니체의 영원회귀는 실현되기 어려울 수 있다. 다만 과학의 실현 가능성을 넘어, 순간의 창조에 대한 니체의 생각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상실감을 안고 사는 현대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현대인은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한다. 죽음 이후의 세계가 어떨지 확신도 증거도 제시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도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막연히 알고 있다. 그리고 암묵적으로나마 죽음 이후의 모습에 대한 자신만의 대답을 마음속에 품고 산다. 종교관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고, 철학과 과학이 영향을 주었거나, 게인적인 체험이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주관적으로 형성된 개인의 사후관은 단지 주관적 믿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그것은 지금 나의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친다. 죽음이라는 예정된 사건은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행위를 이해하게 하는 기준점이 되는 것이다. 죽음의 문제는 항상 삶의 의미와 엮여있다.
4) 삶 : 통시적 측면에서의 인생과 공시적 측면에서의 의식, 사후 세계는 신비의 영역이지만 더 경이로운 신비는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두 측면에서 접근해보자. 두 측면은 시간과 공간을 기준으로 구분된다. 통시적인 측면에서의 인생의 의미와 공시적 측면에서의 의식의 의미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시간을 고려한 역사적 측면에서 개념을 파악하는 것이 통시성이라 하고, 시간성을 배제하고 특정 시점의 현 상황을 기준으로 개념을 파악하는 방법을 공시성이라 한다. 삶은 시간속에서 인생으로 드러나고, 시간을 벗어나 현재의 공간에서 의식으로 인지된다. 삶의 신비를 이해한다는 것은 시간 안에서 발견되는 인생과 공간 안에서 발견되는 의식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삶의 의미 - 인생 : 인생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 이유와 의미는 살아가는 동안은 알 수 없다. 내 인생의 이유와 의미는 끝나는 지점에 가서 비로소 규정된다. 소설을 읽어나갈 때 주인공의 상황과 행동의 의미가 규정되는 순간은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다. 이와 같이 인생의 의미도 삶의 마지막 순간이 도래하는 순간에 나는 비로소 내가 왜 이러한 삶을 살아야만 했는지 총체적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이러한 방법은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와 가다머가 제시한 해석학적 순환에 근거한다. 해석학적 순환은 의미가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이에 따르면 특정 텍스트의 전체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텍스트의 부분들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부분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으로 텍스트 전체의 의미가 선행적으로 이해가 되어있어야만 한다. 하나의 텍스트의 의미는 전체와 순환하면서 비로소 발생한다. 이것이 해석학적 순환이다. 해석학적 순환은 단지 특정 텍스트의 의미를 파악하는 방법론을 넘어서 의미라는 것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알려준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인생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석학적 순환이 필요하다. 끝으로서의 죽음까지 나아가 인생 전체에 대해 앞서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부분으로서의 현재의 삶을 이해하게 되고 현재라는 삶의 부분들을 한 조각씩 이해하게 됨으로써 궁극적으로 인생 전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죽음은 필수다. 죽음이라는 끝이 없다면 삶의 범위는 확정되지 않고 그 의미는 이해되지 않는다. 죽음을 회피하고 모른 체하려는 현대인은 그래서 일상이 허전하고 불안하다. 그것은 의미의 상실속에서 던져진 것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 - 의식 : 공시적 관점에서 의식에 대해서 알아볼 차례다. 삶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할 때, 시간이나 역사성을 배제한다는 것은 지금 내가 살아 있는 상태가 공간 안에서 어떻게 발견되는가를 이해함을 말한다. 그리고 공간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단적으로 지금 '내 눈앞에 세계가 펼쳐져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지금에도 눈앞에 펼쳐진 세계의 대상들을 지각하고 있고 지각된 것들은 내 의식 세계 위에 펼쳐져 있다. 살아있음의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가 드러나는 장으로서의 의식에 대해서 탐구해야만 한다. 간단하게 정신 관련된 어휘들들 정리해보자. 정신과 관련된 어휘들은 이해가 난해하므로 노트북 컴퓨터에 대응해서 이해해보자.
우선 하드웨어를 보면 외부에 입력장치가 있는데 키보드, 마우스, 소형 카메라는 눈, 코, 입, 귀, 피부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안쪽에 보면 CPU, 메모리, 저장장치가 있는데 이 부분이 우리의 뇌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우리의 정신에 해당하는 소프트웨어를 살펴보자. 전원버튼을 누르면 순간 모니터가 밝아진다. 물질로만 구성된 노트북에 전원이 들어온 상태는 인간의 신체에 정신이 들어온 상태에 대응할 수 있다. 화면에 무엇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가장 근원적인 소프트웨어가 필요한데,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윈도우, 맥OS와 같은 운영체제인 OS(operating system)다. OS는 화면에 가장 기본적인 이미지와 텍스트가 드러날 가능성을 열어주는데, 인간에게 이러한 역할을 하는 기본 토대가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식은 정신이 발현될 수 있는 내적 세계의 장을 열어준다. OS가 모니터에 의미있는 무엇인가를 드러날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의식이 인간이 내면 세계를 가질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제 응용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응용프로그램에 해당하는 것이 기억, 정체성, 학습된 내용, 발달된 능력 등이다.
이처럼 우리 머릿속에도 광활한 모니터가 있다. 눈을 뜨고 있든 감고 있든 상관없이 세계를 그려주는 내면 세계가 펼쳐져 있는 것이다. 의식의 열린 장에는 다양한 이미지와 감각, 느낌, 관념, 언어들이 뒤섞여 드러나는데, 이러한 세부 내용들은 질적 차이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하드웨어로부터 오는 것들이고, 다른 하나는 응용프로그램으로부터 오는 것들이다. 먼저 하드웨어=감각기관에서 오는 자극들이 있다. 감각기관에서 촉발되어 의식으로 들어오는 콘텐츠를 감각, 지각이라고 부른다. 이와 달리 소프트웨어, 즉 기억 및 정신의 영역에서 오는 자극들이 있다. 이를 확인하는 방법은 어제 먹은 음식 냄새를 상기해보는 것이다. 이건 직접적으로 지금 감각기관으로부터 오는 자극이 아니라, 내 정신에 남아 있거나 처리되어서 나의 의식에 들어나는 내용들이다. 이를 관념이라고 부른다. 정리하면 나의 의식에는 두 종류의 대상이 드러나는데, 하나는 외부 감각이고 다른 하나는 내면으로부터 오는 관념이다. 이 감각과 관념이 나의 내면 세계를 구성하는 재료가 된다. 의식은 내면 세계를 갖는 능력을 말한다. 이러한 능력을 통해 구성된 세계의 정중앙에 내가 놓여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지금 내가, 나를 기준점으로 세계를 재구성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5) 의식 :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진짜인가?, 의식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선 주관성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주관성은 주인 주에 볼 관으로 말 그대로 세계의 구심점으로서 세계를 인지하고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의식은 이러한 주관성의 원인이자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의식은 주관성을 발현시키는 능력이자, 동시에 주관성에 의해 구성된 세계가 열리는 장이다. 나와 타인은 말 그대로 눈앞의 공간과 물리적 실체를 다르게 구성한다. 예를 들어 정상시 X와 적색맹인 Y가 보는 세상은 다를 것이다. 같은 빨간색을 Y는 다르게 느끼고 그 특정색을 빨간색으로 기억하고 살았을 것이다. 자외선 영역까지 보는 Z가 있다고 해보자 그는 X, Y가 보는 영역보다 더 많은 영역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X, Y가 보는 색과 동일한 색을 보는 것은 아니다. 하늘은 보라색에 가깝게 보이고, 나뭇잎은 청색에 가깝고, 태양은 녹색에 가깝게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가장 세상을 정확하게 보고 있는 것인가? 아무도 없다. 색은 세계의 실제 속성이 아니다. 실제 세계는 색을 갖고 있지 않다. 색은 인간이 물질 세계를 해석한 결과물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눈앞에 펼쳐진 세상도 마찬가지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내 머릿속의 세계다. 외부 세계는 없다. 우리는 모두 내 머릿속에서 산다. 칸트는 그래서 세계를 현명하게 둘로 구분했다. 내 눈앞의 세계는 진짜 세계가 아니라, 내가 구성해낸 주관적인 세계로서의 현상 세계다. 반면 내가 절대로 다가갈수 없는 실제 세계, 전자와 광자가 회오리칠 것으로 예상되는, 빛과 색은 없고 단지 신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진짜 세계는 물자체의 세계다. 칸트에 따르면 나는 현상세계에 살고 물자체에는 결코 닿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생각을 칸트가 처음한게 아니었다. 이런 통찰은 3000년도 더 전에 베타와 우파니샤드에서 상세히 밝혀졌다. 특히 보통사람들은 눈앞의 세계가 환영이 아니라 진짜 세계라고 믿는 경향이 강한데, 베다에서는 이렇게 눈앞의 환영이 실제라고 믿는 착각을 마야라고 불러 이를 경계하게 했다. 8세기의 파드마삼바바도 티베트 사자의 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음이 물질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물질이 마음에서 나온다." 이 말의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겠지만 베다에서 불교로 이어지는 연계성을 고려할 때 이 말은 눈앞의 물질 세계가 실제로는 정신이 만들어낸 환영 세계임을 지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대의 현자들은 이 오래된 지혜를 이미 깊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이 말했던 깨달음은 눈앞의 실체가 사실은 허상임을, 그것은 다만 나의 주관에 의해 구성된 내면 세계임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6) 의식 탐구의 한계 : 발견되지 않는 주관의 세계, 살아있다는 건 그 개인이 온전히 하나의 내적 세계, 하나의 우주를 소유하고 그 안에 거주함을 의미한다. 문제는 자의 내적 세계가 서로 완벽하게 독립되어 있는 까닭에 엄밀히 말해서 타인이 나처럼 내적 세계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데 있다. 나의 의식은 순간순간 나에게 체험되고 있으므로 나에게는 확실하지만, 타인의 의식은 나에게 보이지도 않고 결과 나에게도 체험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의식의 이러한 완벽한 주관성은 자연과학이 의식을 전혀 다루지 못하게 만든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왜냐면 자연과학은 같은 현상에 대해 복수 시점에서 반복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대상만을 탐구 영역으로 삼기 때문이다. 문제는 나의 의식이든, 타인의 의식이든 어떤 의식도 두 명이상이 동시에 관찰하거나 경험할 수 없다는데 있다. 즉, 의식은 주관성 그 자체다. 그래서 과학은 의식 그 자체에 대한 논의 대신, 뇌신경에 대한 생리학적 분석, 심리적 행동에 대한 연구등 물질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영역으로 환원하여 의식을 간접적으로 논의해왔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문제는 과학주의에서 비롯되었다. 과학주의란 과학적 논의의 대상만이 존재한다고 믿는 편협한 사고방식인데, 현대인의 과학주의적 신화는 그들로 하여금 매 순간 강력하게 체험되는 자기 의식의 실체를 보는 대신 과학의 대상이 되는 생물학적 뇌신경에만 마음을 쓰게 만들었다. 과학의 태생적 한계 때문에 언급하지 못하는 의식과 내면 세계를 그것이 아예 없기 때문에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 오해하게 된 것이다. 근대 합리주의 이후의 인류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물질만으로 학문의 체계를 세우는 것이 엄밀하고 합리적인 태도라고 스스로 믿게 되었다. 더 나아가 이렇게 물질로부터 세계를 설명하려는 습관은 눈앞의 세계가 실체 그 자체라는 환상을 심어주게 되었다. 현대인은 오래전 인류의 지혜가 우려했던 마야의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다. 현대인은 물질적인 외부 세계에 마음을 빼앗겼다.
한 명의 인간은 의식적 존재로서, 그는 자신의 내면 세계에 거주하는 주관적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는 내면을 보는자 이고, 그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삶이 신비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침해받지 않는 온전한 하나의 우주를 소유하고, 그 안에서 거주하는 자다. 하지만 세계를 깊게 탐구한 현명한 읻르은 그곳에서 안주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들은 눈앞의 세계가 하나의 환영임을 통찰하고,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고 알려주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내면으로 향하는 길을 찾을 것이고, 깨달음으로 향하는 인생의 순례길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최종 정리
현실 너머 세계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인간의 정신과 관련된 이 영역의 진리에 대한 입장은 절대주의, 상대주의, 회의주의를 기준으로 구분되었다. 우선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철학에서 절대주의, 과학에서는 고전 물리학, 예술에서 고전주의, 종교에서 유일신교를 지지했다. 변화하는 상대적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철학에서 상대주의, 과학에서 현대물리학, 예술에서 낭만주의, 종교에서 다신교를 선호했다.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관심과 다양한 견해에 대한 인정이 우리에게 깊은 깨달음을 줄 것이라고 이들은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이 두 종류의 사람들 외 진리에 대한 접근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회의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의 견해는 오랜 기간 무시되고 억압의 대상이 되어왔다. 다만 현대가 들어서면서 종교와 이성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함께 이들의 견해가 주목받았다. 철학에서는 회의주의, 과학에서 과학철학, 예술에서 현대미술이 여기에 해당한다.
절대주의, 상대주의, 회의주의는 진리에 대한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이들이 학문의 영역 내에서 다루어졌으며 다양한 비판과 대결 속에서도 공적인 공간에서 충분히 논의되어왔다는 점이다. 다만 한 명의 개인은 이러한 공적인 공간에서의 논의 외에도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서의 체험 속에서 살아간다. 타인과는 이야기할 수 없지만 주관적으로 강렬하게 체험되는 것들 말이다. 특히 죽음과 삶의 체험이라는 신비는 자신의 삶을 이해하려는 개인에게 가장 심오하고 중요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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