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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둘 (지대넓얕2) part3 [예술]

by Utnapishtim 2023.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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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학 / 2. 과학 / 3. 예술 / 4. 종교 / 5. 신비 : 채사장님 글에 첨언하거나, 요약한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구입해서 정독 바랍니다.

지대넓얕 시리즈 구조
지대넓얕2 part3 예술

3. 예술

1) 예술의 구분 : 시간의 형식을 따르는 예술과 공간의 형식을 따르는 예술, 예술도 엄연한 진리의 후보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서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사고 방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술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술을 향유하는 과정에서 삶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을 얻는다. 문제는 예술적 체험이 너무나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까닭에, 각각의 개인이 얻는 통찰에 대한 공통 분모를 찾거나 이를 일반화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술은 역사상 과학, 철학, 종교에 비해 진리로서 강조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공적 측면에서의 지위와는 무관하게 사적 측면에서의 예술작품은 구체적인 개인의 내면에 심오한 울림을 선사함으로써 수많은 이를 진리 앞에 이르게 하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예술은 문학, 음악, 미술, 건축, 무용 등 다양한 분야를 갖는다. 이를 단순하게 분류해보면 시간의 형식을 따르는 예술은 문학, 음악, 무용이고, 공간의 형식을 따르는 예술은 회화, 조각, 건축이다. 이중에서 공간적 형식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에 대해서 알아보자.

2) 예술적 진리에 대한 입장 : 어떤 그림이 훌륭한가, 고전주의는 이성을 통해 그림을 그리려는 화풍이다. 조화, 균형, 비례, 법칙을 강조한다. 이런 면에서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절대주의적 측면을 갖는다. 낭만주의 화풍은 개인의 내면과 개성을 존중해 화가의 주관적 표현 방식을 중시하며, 격정적이고 서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런면에서 절대적 진리에 저항하는 상대주의적 측면을 갖는다. 현대미술은 그 폭이 너무나 넓고 다양해서 규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다만 전반적으로 예전 것들에 대한 거부와 새로운 것들에 대한 추구로 압축해볼 수 있다. 현대 미술은 회화의 내용의 측면부터 형식의 측면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예술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일련의 작업이다. 그림의 대상이 소거되거나, 그림을 그리는 주체를 사라지게 하거나, 혹은 예술의 범위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까지 예술의 소재로 활용하는 등 일반인이 보기에는 아무것에나 예술이라고 이름 붙여놓은 과격한 행동을 보인다. "어디까지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직접 실험해보는 것이구나." 정도로 현대미술을 대한다면 마음이 조금 편해질 수 있다. 현대 미술은 과거 예술에 대한 해체를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회의주의적 측면을 갖는다. 

바쁜 일상속에서 예술이 어떤건지 대략적으로 알고 싶은 사람은 고전주의, 낭만주의,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만으로도 실용적인 측면에서 어느 정도 충분하다. 

3) 고대 미술 : 그리스 미술, 헬레니즘, 로마미술,

고대 그리스 미술(절대주의) : 고대미술은 그리스 미술을 대표로 한다. 물론 그리스 이전 시기에도 인류는 예술 활동을 했다. 멀게는 동굴벽화나 토기를 통해서 원시 시대 사람들의 미적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형태의 미적 활동은 지금으로부터 15000 년 전인 구석기 시대, 동굴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그리고 조각한 작품들이다.그들은 미술적 형상을 통해서 현실의 욕망을 기원했다. 이후 기원전 4천년 무렵의 이집트에서는 예술 작품이 죽음이나 영원한 삶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반영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집트인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육체를 떠나 다른 삶을 누린다고 믿었는데, 이러한 사후관은 이집트 미술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대신 영원성을 담아내는 수단이 되도록 이끌었다. 당시의 화가들과 조각가들의 사명은 죽은 자의 영혼이 생활하게 될 묘실 안에 현세를 재현하는 것이었다. 이집트의 벽화, 조각, 피라미드, 스핑크스 등이 이러한 영원성을 반영한 종교적 예술 작품이다. 

이집트 피라미드, 출처 : 나무위키

우리가 일반적으로 예술이라 하면 떠올리는 것처럼 아름다움을 대상으로 하는 본격적인 작품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 그리스인은 원근법이나 수학적 비례를 통하여 조화와 안정을 작품에 반영했다. 물론 그들 역시 신화의 신들을 소재로 했지만, 이것은 이전의 종교적 작품과는 차이가 있다. 이집트인이 신의 속성으로서의 영원성을 나타냈다면, 그리스인은 신화적 존재들은 조화와 균형을 통해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쉽게 말해 이집트에서는 종교를 위한 수단의 예술이었으나, 그리스에 와서 예술은 독자적 가치로서 목적 그 자체였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미술 작품은 조각과 건축에서 성과가 컸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과 에렉테움 신전이 이를 대표한다.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출처 : 나무위키

그리스 미술이 한층 더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대제국 건설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 주변부에 위치한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짧은 재위 기간 동안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체국을 건설했다.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에 인접해 있던 까닭에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알렉산드로스는 스승이 아리스토텔레스였기 때문에 그리스 문화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 아테네의 에렉테움 신전, 출처 : wikipedia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건설된 대제국의 문화를 헬레니즘이라고 한다. 헬레니즘은 고대 그리스 문화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다만 알렉산드로스가 대제국을 건설하면서 서양과 동양이 교류할 수 있는 길을 열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혼합과 융합을 거쳐 새롭고 독창적인 예술 양식이 등장하게 되엇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헬레니즘 미술의 특징을 형성했다. 헬레니즘 미술은 그리스 예술의 조화와 균형을 기반으로 동양적인 신비함과 유연함이 반영된 동시에 제국의 위용에 걸맞는 강력하고도 극적인 효과가 강조되었다. 라오콘은 이러한 복합적인 특징을 잘 드러낸 걸작이다. 이 작품은 큰 뱀에게 칭칭 감겨 몸을 뒤트는 라오콘과 두 아들의 고통이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외에도 사모트라케의 니케, 밀로의 비너스가 대표적이다.

헬레니즘 미술 (라오콘 조각), 출처 : wikipeida

대제국의 헬레니즘 문화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서른세 살에 요절하면서 와해되어 갔다. 결국 신생 제국으로 떠오르던 로마에 흡수되었다. 이탈리아반도의 작은 마을에서 출발한 로마는 1세기 무렵에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을 정복하며 거대 제국으로 성장했다. 실제로 당시 로마의 면적은 오늘날 미국의 2/3에 이르렀다. 로마인은 그리스 정복에 성공함으로써, 평소에 동경하던 그리스 미술을 현실에서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 미술을 국제적인 성격을 띤 보편의 미술로 확장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과 신화, 문화가 유사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로마는 건축에서 압도적인 역량을 보여주었다는데, 대표적으로 원형 경기장인 콜로세움, 로마의 모든 신에게 바쳐진 판테온 신전 등이 있다. 

로마 콜로세움, 출처 : 나무위키
로마 판테온, 출처 :Wikipedia

정리해보면 고대 미술은 그리스 미술, 헬레니즘, 로마 미술로 이어지는 예술로서, 기본적으로 그리스 정신을 기반으로 한다. 다양한 소재와 기교 속에서도 그 근본은 조화와 균형, 비례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이 그리스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미술은 일반적인 미술의 모습으로 절대주의적인 측면을 갖는다. 실제로 예술 철학과 미학에서는 가장 근본이 되는 그리스 미술의 양식을 미의 대이론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예술적 정신은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수많은 예술가에 의해 끊임없이 재현되고 모방되는, 예술이 스스로 회귀하고자하는 이데아적 모델로 작동했다. 

4) 중세 미술 : 초기 미술, 로마네스크, 고딕

중세 그리스도교 미술(절대주의) : 아름다움의 이데아를 추구했던 그리스-로마 미술은 중세가 되면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중세 초기의 환경적 요인을 들 수 있다. 중세 초기라 할 수 있는 4세기부터 9세기에 이르는 5백 여년간은 전쟁과 약탈이 반복되는 혼란기였다. 다른 하나는 내적인 측면으로서 그리스도교의 탄생과 확장에 있다. 근대 철학자 니체에 따르면 그리스도교는 자신들의 주인이었던 그리스-로마 문명에 원한을 가진 유대인의 노예 도덕을 근간으로 한다. 주인이 가진 좋은 덕목을 악으로 규정한 이들은 인간적이며 진취적인 그리스-로마의 문화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들의 순종적이고 검소하며 금욕적인 덕목을 선으로 규정했다. 그래서 유대교적 가치 체계를 이어받은 그리스도교가 장악한 중세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그리스의 거대 이념이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에서 예술은 단지 교리 전달의 보조 수단으로서만 그 명맥을 유지했다. 그리스도교의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특성은 종교와 관련되지 않은 예술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종교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운 중세의 시간 동안 예술은 사실상 퇴보했다. 다만 중세 후기에 이르러서는 교회 건축의 발전과 함께 장식으로서의 예술이 미약하게나마 발전할 수 있었다. 중세 초기의 미술은 단지 문맹자들에게 신의 섭리와 교리를 전달하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 쓰였을 뿐이다. 교회는 신, 영원, 속죄, 믿음 같은 형이상학적인 개념들을 시각적 이미지로 바꾸는 것에 미술의 역할이 있다고 보았다. 당시의 예술가들 역시 자신의 재능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선물이므로 당연히 신에게 돌려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작품들은 대부분 익명으로 제작되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의 지하묘지이자,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해서 예배 장소로 사용되었던 카타콤의 벽면에는 당시의 그림들이 남아 있다. 다소 유치한 모습인 벽화는 중세 초기의 예술이 예술의 목적이 아니라 교리 전달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로마 카다콤, 출처 : 나무위키

중세 초기의 카다콤 모자이크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왼손에는 생선을, 오른손에는 빵을 들고 있다. 이것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배불리 먹였다는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은 더 이상 과거 그리스의 화려한 미적 성취를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기교의 조악함만으로 중세 초기 미술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중세의 기독교적 세계관과 역사성을 담지하고 있고 당시 예술가들의 가치 체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중세 초기 미술은 비교할 수 없는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카다콤 (모자이크), 출처 : https://pin.it/3bAlBBv

313년,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공인함으로써 땅 밑의 어둠에 잠겨있던 초기 그리스도교 예술은 극적인 전환을 맞게 된다. 국가 차원의 강력한 지원과 함께 제국의 거대한 공적 예술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특히 콘스탄티누스는 324년에 사도 베드로의 묘지 위에 교회를 건축하게 함으로써, 오늘날 바티칸시국의 주성당이자 세계 최대 규모의 교회당인 성 베드로 대성당이 건설될 수 있는 기초를 닦았다.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외부와 내부, 출처 : 나무위키

11세기 후반에 이르러 그리스도교가 유럽 전역을 완벽히 장악하자 거대한 교회가 빈번하게 건설되었고, 이에 따라 건축술과 예술이 함께 발전했다. 유럽에서의 교회의 승리를 상징하는 이러한 건축과 미술 양식을 로마네스크라고 한다. 번역하면 로마풍 정도가 되는데 당시 웅장한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서 고대 로마의 건축 기술과 양식을 도입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단단하고 육중한 모습의 로마네스크 석조 건물들은 멀리서 떨어져서 봐도 꽤나 묵직한 것이, 마치 성이나 요새처럼 보인다. 특히 가능 높은 탑의 지붕이 둥글게 돔형을 이루고 있는 게 특징인데, 이는 동방과 잦은 전쟁 과정에서 이들의 문화에 영향을 받은 까닭이다. 이후 등장하는 고딕 양식이 벽의 두께를 줄이고 높은 첨탑을 만든 것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대표적인 로마네스크 건축물로 이탈리아의 피사 대성당이 있다. 

이탈리아의 피사 대성당, 출처 : 나무위키

로마네스크가 이렇게 두껍고 육중한 모습을 띠게 된데는 종교 해석적인 이유와 기술적인 이유가 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당시의 교회가 지상에서 만든 신의 공간이라는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교회는 신이 내제하여 외부의 악한 세력으로부터 종교적 이념을 수호하는 전투적인 공간이었다. 그런 까닭에 건축은 성이나 요새같은 모습을 띠었다. 기술적인 면에서 건축 공법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건물을 높게 올리기 위해서는 그 무게를 지탱할 기둥과 벽도 함께 두꺼워질 수 밖에 없었다. 두꺼운 벽 때문에 창은 좁고 작게 낼 수 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실내는 어둡고 차분한 느낌을 자아냈다. 당시 시대 사람들은 신이 근엄하고 무거운 존재라고 느꼈을 것이다.  

11~12세기의 2백 년 동안 로마네스크 양식이 유행했다면, 이후 200년 간은 고딕 양식이 유행했다. 고딕은 건축술의 발전과 함께 등장했다. 천장과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는 기둥과 골격에 대한 기술이 발전하면서 벽의 두께는 얇아졌고, 높고 아찔한 첨탑들이 들어섰다. 그래서 건물은 한결 가벼워보인다. 벽이 얇아지면서 큰 창문을 낼 수 있게 되었고, 유리창에 장식을 하는 스테인드글라스가 크고 화려해지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석재 기둥으로 내부 공간은 높고 넓어졌으며, 정면에는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당시 사람들은 천국에 대한 동경과 신의 영광에 대한 감정의 고양을 경험했을 것이다. 고딕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은 파리의 샤르트르 대성당과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고, 한국의 명동성당이 고딕 양식을 따르고 있다. 

프랑스 파리의 샤르트르 대성당, 출처 : Wikipedia

중세 예술은 신과 교회에 종속되며, 형식적으로 교회 건축의 발전과 함께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술의 독자적인 가치는 인정되지 않았고, 신의 영광과 권위를 드러내거나 교회의 교리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예술이 사용되었다. 다만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을 지나서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을 지나면서 미적인 요소가 반영되고 확장되었다. 중세 예술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불변하는 진리로서의 신에 대한 예술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대 그리스-로마 예술처럼 절대주의적 예술로 평가할 수는 없다. 내용상 절대적인 존재를 다루고 있으나, 예술의 본질로서 아름다움의 형식에서는 퇴보한 느낌이 강하다. 

5) 르네상스 미술 : 르네상스 양식, 바로크, 로코코

르네상스 양식(절대주의) : 르네상스는 중세의 신 중심 세계관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중세의 주인공인 왕과 영주들은 물질적으로 장원을 소유함으로써 지배 권력을 획득하고, 정신적으로는 신으로부터 지배의 정당성을 얻었다. 이들과 대립하며 성장한 부르주아는 새로운 생산수단으로서 공정을 소유함으로서 물질적인 측면에서 권력 기반을 확보했으나, 정신적 측면에서는 아직 종교에 종속되어 있었다. 부르주아는 신을 대체할 새로운 정신적 가치를 탐색했고, 결국 인간의 이성에서 그 가능성을 찾았다. 부르주아가 인간의 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지향한 문화는 중세 이전의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였다.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은 그리스도교의 절대적 유일신의 손이 닿지 않았던 고대 문화에서 인간의 가치를 복구하기 위한 영감을 얻었다. 물론 실제로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화가 완벽한 인간 중심의 문화였는지는 의심스럽다. 당시에도 종교로서 신화가 인간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대가 인간 중심의 문화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은 중세의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그리스도교 신에 비해서 고대의 신은 충분히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와 유일신에 대항해서 인간적 가치가 필요했던 부르주아들은 고대 사회로 관심을 돌렸고, 고대 문화를 재탐색하는 분위기가 학계와 예술계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를 르네상스라고 한다. 르네상스는 부활, 다시 태어남을 뜻하는데, 여기서의 부활과 재생은 고대 문화의 부활과 재생을 뜻함과 동시에 인간적 가치의 부활과 재생을 의미한다.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이 문예부흥운동은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다만 14~16세기에 일어났던 르네상스는 과도기적 측면이 컸다. 중세를 극복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종교적 측면에서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있었고, 경제적 측면에서도 자본주의를 도입하거나 이를 바탕으로 한 가시적인 계급 변화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최근에는 르네상스를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 르네상스를 근대의 시작으로 보기보단 중세의 마지막에 등장한 문화로 평가하고자 하는 견해가 그것이다. 르네상스가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 변화가 시도되었다는 것만 알아두면 된다. 

르네상스 미술은 초기와 전성기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초기 화가들은 현실적이고 객관적으로 인체를 묘사하려고 했고, 정확성에 치중했다. 그러나 화면 속의 개별 대상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가 두드러진 반면에 그림 전체의 조화로운 구성에는 아직 소홀했다. 그림의 소재에는 고대 신화에서 따온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 있다.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출처 : 나무위키

거인족 크로노스가 아버지인 우라노스를 거세한 후에 남근을 바다로 던졌는데, 그 남근 주위에서 거품이 모여 미의 여신 비너스가 탄생되었다는 그리스 신화를 담고 있다. 가운데 비너스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바람의 신이 비너스를 해안으로 인도하고 있고, 오른쪽에는 계절의 여신이 외투를 벗어 비너스를 맞이하고 있다. 이후 전성기의 르네상스 미술은 다른 어떤 시기보다도 많은 천재가 나타났다. 이 시기 작품들은 이성적인 규칙을 통한 객관성과 정확성을 토대로 창작되었고, 동시에 조화와 균형이라는 미의 이념이 이상적으로 구현되었다. 대표 화가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로, 그는 15세기 중엽부터 16세기 초까지 활동했다.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 건축가, 기술자 이기도 했던 레오나르도는 전형적인 천재의 모습을 보여주는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는 평생동안 삼십 구 정도의 시체를 해부함으로써 인간의 골격과 근육의 움직임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인물을 현실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다. 또한 공기원근법의 이론을 정립해서 2차원의 평면의 깊이감을 강화하기도 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출처 : 나무위키

원근법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일반적인 것은 선원근법으로 평면에 대각선을 그려서 물제가 점점 작아지다가 결국 사라지는 소실점을 만들고, 이를 기준으로 앞의 물체는 크게, 뒤의 물체는 작게 그리는 방식을 말한다. 다른 원근법으로는 공기원근법으로 가까이 있는 것은 선명하게 보이지만, 멀리 있는 물체일수록 공기로 인해 푸른색이 가미되고 채도가 낮아져 윤곽이 희미해지는 현상을 표현한 방법이다. 공기원근법이 잘 표현된 작품이 모나리자다. 이 작품은 인체와 공간에 대한 사실성과 객관성을 바탕으로한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모범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외에도 동방박사의 예배, 최후의 만찬 등이 유명하다. 

레오나르도 외에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은 미켈란젤로다. 레오나르도보다 20살 정도 어린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와 경쟁 관계였다. 레오나르도가 회화에 집중한 반면, 미켈란젤로는 조각에 집중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그를 단번에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한 피에타가 있다. 피에타란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의 이탈리어어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를 거의 어머니 마리아가 안고 있는 모습을 조각했다. 침울하지만 비통하지 않은 절제된 마리아의 표정과 사실적인 묘사는 경건함을 자아낸다. 

미켈란 젤로 (피에타), 출처 : 나무위키

이 외에도 다비드 상과 모세상이 그의 천재성을 드러낸 작품으로 남아있다. 그는 평생 자신이 조각가라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교회에서는 그가 회회도 그리기를 기대했다. 그런 요구로 그는 시스티나의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 등을의 작품을 남겼다. 시스티나의 천장화에는 누워있는 아담과 하늘 위의 신이 손가락을 맞대려고 하는 그 유명한 천지창조의 그림이 포함되어 있다. 다만 그의 회화는 2차원의 회화적인 장식미가 있다기보단 뒤의 풍경을 최소화하고 인물의 신체를 강조한 조각적인 면모가 강하게 나타난다. 그는 그림을 조각처럼 표현했다.

르네상스 미술은 교회에 종속되어 있던 수단으로서의 예술에서 벗어나,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처럼 예술 자체의 가치를 회복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이성적으로 완벽함과 조활르 추구하고 궁극적인 보편의 미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르네상스 미술은 절대주의적 측면을 갖는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르네상스 미술은 17세기가 되면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규칙적인 측면에 대한 반발에 직면했다. 이성이 아닌 감성에 호소하는 상대주의적 화풍이 등장한 것이다. 이를 바로크라고 한다.

바로크, 로코코 (상대주의) :  르네상스 미술 이후 17세기와 18세기는 각각 바로크와 로코코의 시대였다. 르네상스 미술이 이성적인 측면이 강했다면, 바로크, 로코코는 감성에 호소하는 예술 사조였다. 다만 바로크는 무겁고 어두운 반면 로코코는 밝고 가볍다는 차이가 있다. 우선 바로크는 포르투갈어로 비뚤어진 진주라는뜻이다. 처음에는 르네상스 미술에 비해 단정하지 않고 우아하지 못하다는 경멸의 뜻으로 씌였으나, 이후 전 유럽을 휩쓴 고유한 양식으로 자리잡았다. 르네상스 미술이 고전적인 균형과 조화의 세계를 표현하려 했던 것과 달리 바로크는 역동적이고 장식적인 예술을 추구했다. 이 시대를 연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카라바조다. 그의 대표 작품으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가 있는데, 그는 주위를 어둡게하고 주인공에게 스폿라이트를 비춰 명암의 대비를 극대화 함으로써 감상자가 정서적으로 강력한 체험을 하게 했다. 이러한 특성은 이후 바로크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강렬한 명암과 화려하고 역동적인 형태의 바로크 화풍은 루베스에 이르러 정점에 이르렀다. 루벤스는 바로크의 대표 화가로 작품으로는 십자가를 세움과 십자가에서 내려지심이 유명하다. 세 개의 패널로 그려진 이 대작은 살아 움직일 것만 같은 신체의 역동성이 강력한 색채와 함께 화려하게 그려진 작품이다. 십자가에서 내려지심은 프란다스의 개에서 주인공 네로가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그림으로 등장한다. 

루벤스의 (십자가를 세움, 왼쪽), (십자가에서 내려지심, 오른쪽), 출처 : 나무위키

카라바조와 루베스 외에도 렘브란트와 베라스케스 등 천재적인 화가들이 이 시대를 주도했다. 

18세기가 되면 바로크의 감성적인 측면을 이어받지만 그 표현의 무게감과 강력함에서 벗어나 부드럽고 섬세하며 에로틱한 분위기의 로코코가 등장한다. 로코코는 프랑스에서 탄생해 전 유럽에서 유행했는데, 그건은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무렵 왕권이 약화되고 부르주아가 세상의 주인공으로 떠오르면서, 예술가들도 왕실을 위한 그림보다 부르주아나 귀족의 주거 장식을 위해 아늑하고 감미로운 동시에 에로틱한 감성의 밝은 화풍이 주를 이루었다. 영화에서 프랑스의 화려하고 장식이 많으며 향락적인 사교계를 흔히 볼 수 있는데 , 그때의 전형적인 모델이 되는 시기가 로코코 시대라 할 수 있겠다. 이 시기 대표 화가는 부셰다. 그는 프랑스 로코코 미술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화가다. 당시에 휴행하는 소품, 장식들을 그림의 소재로 사용하는 대중적인 화가로, 당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40년간 활동하며 회화만 천 점을 제작할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까닭에 현재까지도 많은 작품이 남아 있다. 비너스의 화장, 아침 식사등이 유명하다. 

부셰의 (비너스의 화장, 왼쪽), (아침식사, 오른쪽), 출처 : 나무위키

6) 초기 근대 미술 :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신고전주의(절대주의) : 르네상스 이후 근대 미술은 크게 초기 근대와 후기 근대로 구분된다. 우선 초기 근대 미술은 코로로의 퇴폐미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다. 로코코의 감성적이고 유약하며 여성적인 측면에 대한 반발이 다시 예전의 고대 미술이나 르네상스 미술의 이성적이고 강인하며 남성적인 모습으로의 회귀를 낳은 것이다. 이들은 예술의 뿌리가 되는 고대 그리스-로마 미술로 돌아가고자 했기에 신고전주의라고 불렀다. 사실 신고전주의는 화풍 면에서 새로울 게 없다. 단지 그리스-로마 미술로의 복귀가 이들의 추구점이다. 르네상스의 이성에 대한 반대가 바로크와 로코코를의 감성을 낳고, 이에 대한 반대가 다시 신고전주의의 이성 추구를 낳은 것이다. 신고전주의의 이성 추구에 반대해서 다시 낭만주의가 인간의 감성을 앞세우며 등장한다. 초기 근대 미술은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결이었다. 

프랑스 로코코의 퇴폐미에 대한 저항으로 영국에서 시작된 신고전주의는 다시 프랑스로 수용되어 절정을 맞이했다. 당시 프랑스에서 신고전주의가 빠르게 확산된 건 시민의 요구가 아니라 국가 주도에 의한 확산이 원인이다. 당시 루이 16세는 프랑스 로코코의 향락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움숙하고 계몽적이며 애국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국가 차원에서 화가를 양성했다. 이 아카데미에 소속된 화가들은 매년 두번 열리는 살롱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는 국가 차원의 관심 속에서 개최되었다. 그런데 살롱전의 심사자들이 최고 가치를 부여하는 작품은 언제나 성경, 신화, 고대사 등을 다루는 역사적인 작품이었다. 그런 까닭에 화가들은 역사적인 측면에 몰두하게 되었고, 개인의 주관과 감성은 등한시 되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은 화가 다비드다. 그의 뛰어난 재능은 프랑스 전체의 미술 흐름을 고전적이고 엄숙한 분위기로 바꾸는데 기여했다. 대표적인 그림으로는 마라의 죽음, 호라티우스의 맹세, 소크라테스의 죽음 등이 있다. 

자크루이 다비드의 (마라의죽음, 왼쪽), (소크라테스의 죽음, 오른쪽), 출처 : wikipedia

다비드 외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는 앵그르다. 그는 다비드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스스로를 혁신적인 인물이 아니라 고전 미술을 보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고대 미술은 남성의 근육이나 누드를 미적 대상으로 묘사했던 것과 달리 앵그르는 여성의 누드를 주로 그렸다. 그리는 대상은 달라졌지만, 그리스 조각 작품의 미적요소를 분석하고 이를 고전풍의 세련미로 그려낸 까닭에 그는 전형적인 신고전주의 화가로 평가된다. 

앵그르의 그랑 (오달리스크, 왼쪽), (터키 욕탕, 오른쪽), 출처 wikipedia

앵그르그의 여성을 그려내는 천재적인 소묘 능력과 미적인 탁월성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이후 회화에서 남성 누드는 거의 사라지고 여성 누드가 프랑스 예술계를 지배했다. 대표작으로 그랑 오달리스크, 샘, 터키 욕탕 등이 있다. 

낭만주의(상대주의) : 낭만주의는 신고전주의의 이성적이고 엄숙하며 절대적인 측면에 대한 반발로 탄생했다.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신고전주의가 고대를 모방하고 재현하려고만 했을 뿐, 개인의 감성과 주관의 탁월성을 소홀히 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창작자의 주관적인 표현을 강조하고 자유로운 공상과 환성의 세계를 그림의 대상으로 하는 낭만주의 미술이 탄생했다. 감성을 중시한다는 측면에서 바로크, 로코코와 유사한 측면이 있지만 화려하고 장식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보다는 화가의 강렬한 내면을 외부 세계에 투영한다는 측면이 강했다. 작가의 주관적 해석과 내면의 감성을 중시했던 까닭에 낭만주의는 자연스럽게 작가의 천재성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격정적이고 창백하며 고뇌로 가득 찬 전형적인 천재의 이미지는 이때 확립되었다. 

낭만주의 미술의 창시자 격인 인물은 제리코다. 그의 작품 메두사호의 뗏목은 당시 미술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실제 사건을 소재로한 이 작품은 낭만주의 미술의 전형적인 요소들인 격렬한 움직임, 강렬한 명암 대비와 색채 효과 그리고 극적인 상황 등을 모범적으로 담고 있다.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의 땟목), 출처 : Wikipedia

제리코의 친구이자, 그에게 영향을 받은 들라크루아는 후에 낭만주의 대표 화가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대표작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그리고 낭만주의 선언서로 여겨지는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등이 있다. 

들라크루아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출처 : Wikipedia

초기 근대 미술은 이성과 절대적 객관성을 강조한 신고전주의, 감성과 상대적 주관성을 강조한 낭만주의로 구분된다. 이성과 감성, 절대와 상대의 대립은 후기 근대까지 이어졌다. 

7) 후기 근대 미술 :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사실주의(절대주의) : 리얼리즘과 같은 말로, 낭만주의가 보여주는 극적이고 과장된 미적 양식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생겨났다. 낭만주의가 화가의 상상력으로 이상적인 세계를 창조하는 반면 사실주의는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길 요구했다. 그런데 문제는 사실의 의미가 다양하다는데 있다. 무엇이 사실인가, 눈에 보이는 자연과 인물을 단지 있는 그대로 그리는게 사실인가? 하지만 이런 생각은 당시 사진기의 발명과 함께 화가들로부터 회의적으로 여겨지고 거부되었다. 정확한 묘사만으로 화가를 평가할 수 없다. 만약 정확한 묘사가 예술의 기준이 된다면 그 어떤 화가도 사진기만큼의 예술적 창작을 할 수 없을테니 말이다. 그래서 사실주의에서의 사실은 눈에 보이는 사물을 똑같이 그려낸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릴 대상을 선정하는 데서의 사실을 추구한다는 의미다. 쉽게 말해, 우리의 남루한 현실을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 사실이 되는 것이다. 이전 그림들은 도자기 같은 피부를 가진 여신의 누드를 그린다거나 한껏 치장한 귀족을 아름답게 그렸다. 하지만 이것은 일상적인 현실이라는 사실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었다. 사실주의 미술은 진짜 사실을 그려내려고 노력했다. 노동자의 남루한 삶이나 이웃의 가난, 노동의 고됨을 가감 없이 표현했다. 

이를 대표하는 화가로 쿠르베로, 사실주의 시작을 알린 인물인 동시에 사실주의 미술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쿠르베는 파리 살롱전에서 오르낭의 매장을 출품하여 엄숙한 아카데미 비평가들의 혹평과 대중의 환호를 동시에 받았다. 이 작품은 시실주의의 신호탄이었다. 이후 그는 돌 깨는 사람, 화가의 아틀리에 등 현실의 모습을 가감없이 담담하게 보여주는 사실적인 그림을 그려냈다. 당대의 가난한 다수를 있는 그대로 그렸을 뿐이지만, 쿠르베의 그림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당시 사회 분위기에 기인한다. 

쿠르베 (오르낭의 매장), 출처 : Google Art & Culture

프랑스 혁명 이후 왕과 귀족 중심의 엘리트주의에서 다수의 가난한 민중의 참여가 강조된 민주주의로 변화하면서 당시는 이념 대립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왕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세계관과 민중을 중심으로 한 혁명적 세계관이 충돌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민중을 회화의 주인공으로 가져온 것만으로도 그의 작품은 진보 성향을 강력하게 대변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표현 방식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정치적 이념성으로 결국 20세기가 되면 사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를 추구하는 공산주의 정치 이념을 대변하게 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불리는 이러한 미술 사조는 1934년 제1회 소비에트 작가회의에서, 사회주의 사상에서 인정하는 유일한 창작 방법으로 채택되었다. 공산주의 이념을 선전하고 확산하는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미술이 미의 추구라는 본질에서 벗어나 이념 전달의 수단이 되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중세 암흑기의 교회 미술과 비슷한 양상을 띤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결과론적인 정치적 이용과는 무관하게, 사실주의의 탄생은 예술에서 배제되었던 일상을 예술의 소재로 데뷔시키고, 예술의 의미를 새롭게 고민하게 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의를 갖는다. 

인상주의(상대주의) : 작가의 주관과 감성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인상주의를 낭만주의와 같이 상대주의적 미술로 분류했으나, 인상주의는 고전주의뿐만 아니라 낭만주의에 대해서도 저항하며 탄생했다. 19세기 말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탄생한 이 미술 사조는 사실주의처럼 낭만주의의 비현실적이고 과장된 화풍을 거부하고 일상의 삶과 자연을 그려내고자 했다. 다만 사실주의가 민중의 가난과 노동이라는 정치, 경제적 측면의 소재를 채택했다면, 인상주의는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을 가감없이 그려내려고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대로 세상을 보지 못한다. 보이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 아닌 언어를 본다고 하는 편이 실제에 더 부합할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하고자 했던 일은 개념이나 이념을 걷어내고 순수하게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흰색 컵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태양 아래서 순간적으로 반짝이고 변화하는 컵 표면의 색깔을 그리려고 했다. 인상주의 화풍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완성이었던 인물은 모네다. 그의 대표작은 인상 해돋이, 수련 연작, 일본식 정원, 루앙 대성당 등 대단히 많은데, 아름다운 색채로로 지금까지도 인기가 많다. 

클로드 모네 (인상, 해돋이), 출처 : Wikipedia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해가 뜨는 장면이 우리에게 주는 인상을 어떻게 이렇게 잘 표현했는지 놀랍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 그림을 매우 불편하게 생각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림이란 일단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보여주듯이 두꺼운 물감으로 무게감 있게 표현되어야만 했다. 실제로 당시 사람ㄷ르은 붓칠이 그대로 보이는 모네의 그림을 너무 못그린 그림이라고 평가했다. 모네 외에도 같은 시대에 인상주의로 분류된 화가들은 마네, 르누아르, 드가, 로댕 등이 있는데 이들은 보통 전기 인상파 화가로 불린다. 

전기 인상주의 단계를 거쳐 독자적이고 다양한 방법으로 인상주의를 넘어서려고 노력한 화가 집단을 인상주의 이후에 나타난 화가들이라는 뜻으로 후기 인상파라고 부른다. 이들은 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에 근거해서 그림을 그렸다. 대표적인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는 고흐, 고갱, 세잔 등이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선 고흐와 고갱이 특별히 인기가 많다. 하지만 후기 인상파 화가 중 미술사의 측면에서 중요하게 다뤄야 할 인물은 세잔이다.

세잔 (정물화), 출처 : 나무위키

세잔은 근대를 마무리하고 현대미술을 탄생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처음에 세잔은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며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이 사물의 형태보다는 순간적인 빛의 변화에 집중했던 것과 달리 세잔은 사물의 형태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일상의 평범한 사물들에서 견고하고 영구적인 형태를 찾아내고자 했다. 예를 들어 현실의 불완전한 사과는 기하학의 구로, 나무는 원기둥으로, 산은 원뿔로 환원하려 했다. 이렇게 사물의 형태와 색채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을 위해 그는 비슷한 그림을 여러차례 반복해서 그렸다. 대표적으로 목욕하는 사람, 카드놀이 하는 사람, 생 빅투아르산, 정물화는 비슷한 그림이 수없이 존재한다. 그 중 정물화는 무엇인가 어긋나 있고 잘못 그렸다는 생각이 든다. 왼쪽과 오른쪽 테이블 모서리의 평행이 맞지 않는다. 이러한 불일치는 세잔이 잘못 그려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정확하게 그려서 발생한다. 실제로 사람은 시각적으로 중간 부분이 가려진 직선을 어긋나게 보거나 물체의 수평을 다르게 본다. 멀리 아무리 직선 형태의 사물을 찾아서, 한 쪽 눈을 가린 상태에서 손바닥으로 직선의 중간부분을 가리고 양쪽 직선이 평행하게 보이는지 살펴보자. 흥미롭게도 양쪽 직선은 어긋나 보인다. 세잔은 사물을 반복해서 관찰함으로써 이성적으로 시각이 조정되기 전의 상태를 하나의 화폭에 구현한 것이다. 그가 진정으로 그리고자 한 것은 화가라는 단일한 관점으로 포착한 인상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세잔은 인상파와 결별한다. 인상주의가 순간적인 이미지를 빠르게 그릴 때 당연히 전제하는 것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 단일한 화가의 시선이다. 사실 인상주의 뿐만 아니다. 기존의 모든 그림은 한 명의 화가의 관점에서 본 1인칭의 세계를 그린다. 이때의 주인공은 화가가 된다. 회화는 화가 중심의 세계인 것이다. 반대로 세잔이 그리고자 한 것은 사물 그 자체의 본질이다. 이때 그림의 주인공은 사물의 본질이 된다. 세잔의 이런 선구적인 작업은 후에 현대 입체파와 추상미술을 탄생하게 함으로써 현대 미술이 시작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근대 미술은 초기와 후기로 나누어진다. 초기의 근대 미술은 객관적 이성을 중시하는 신고전주의와 주관적 감성을 강조하는 낭만주의의 대결로, 전통적인 대립 구도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후기에는 사실주의와 인상주의가 등장하며,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모두 비판했다. 특히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선택했던 소재의 역사성이나 종교성에서 벗어나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그림을 그리고자 했던 것이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의 특징이다. 다만 사실주의가 노동과 민중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그렸다면, 인상주의는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빛의 인상을 그리려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인상주의는 후기에 이르러 다채롭고 개성 넘치는 천재 화가들을 탄생시키며 실험적인 현대 미술로 넘어가는 교두보가 되었다. 

근대미술을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미술로 구분해보면, 신고전주의의 절대적인 측면과 낭만주의의 상대적 측면은 각각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로 이어진다고도 볼 수 있다. 우선 사실주의는 감성을 강조하는 낭만주의의 과장된 화풍을 거부하고 실제 현실을 그리려고 했다는 점에서 절대주의적 측면을 갖는다고 하겠다. 하지만 사실주의가 정치적 이념성을 강하게 내포했고, 이후 사회주의 체제를 선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화했다는 점에서 중세의 그리스도교 미술처럼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에 포작되지 않는 논외의 미술 화풍으로 분류하는게 타당하다. 반면 인상주의는 낭만주의에 대한 거부이긴 하지만, 화가 개인의 주관과 감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상대주의적 미술로 분류할 수 있다.  

8) 현대 미술 : 입체주의와 추상미술, 후기 인상주의 이후 20세기가 되면,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미술 형식과 예술철학들이 다채롭게 발생했다. 고흐와 고갱의 원색적인 색채와 화가 내면의 강렬한 정신은 각각 야수파와 독일의 표현주의로 이어졌고, 세잔의 사물을 분석하고 하나의 화폭에 두 개 이상의 시점을 담아내는 표현범은 입체파로 계승되었다. 이 외에도 이탈리아의 미래주의, 영미의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까지 현대 미술은 규정하기 어려운 다양하고 독창적인 방법으로 발전해갔다. 다만 공통점을 찾는다면 과거의 전통을 거부하고 창조적인 실험 정신을 근간으로 한다는 것이다. 현대 미술은 새로움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는 듯 하다. 서양철학이든, 미술이든 새로운 분야에 대한 선구적인 개척자만 역사상으로 기억되고 가치를 인정받아왔기 때문이다. 대중이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예술가들이 새로움에 대한 탐색을 계속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아무리 충격적이고 놀라운 시도라도 오래되면 익숙해지고 식상해진다. 이제 예술가들은 무엇을 새롭게 추구할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생각이 극단으로 향한다. 대상을 변화시키는데 한계가 있으므로 차라리 대상을 없애버리자라고 생각한다. 사물을 바라보는 단일한 시점을 유지하는 것이 예술의 필수 조건이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실재하는 대상도, 상상의 대상도 모두 없애버리고 대상이 없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화폭에는 이제 색과 선, 면들의 유희만이 남았다. 이로써 추상미술이 탄생했다. 현대미술에서 입체주의와 추상미술은 매우 중요한 두 사조가 된다. 이들은 새로움에 대한 시도로, 예술의 대상을 새롭게 분석해서 제시하거나, 혹은 아예 제거했다. 

입체주의(회의주의) : 큐비즘이라고도 부르는 입체파는 파리에서 일어난 미술 혁신 운동이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인 세잔이 사물의 기하학적 분석과 다양한 시점의 적용을 도입한 이래로,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이 큐비즘이다. 대표 작가로 피카소가 있다. 그는 어릴때부터 그림에 대한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는데, 10대 후반기에 이미 고전주의 미술 양식에 익숙해 있었다. 그런 까닭에 그가 처음 입체주의 그림을 그렸을 때 주변 사람들은 크게 걱정했다. 다양한 관점의 대상을 하나의 화폭에 담은 결과물은 너무나 기괴했고, 기존의 예술에 대한 관념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피카소는 사람들의 우려와 달리 새로운 미술 양식을 연 세계적인 예술가로 인정받았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입체파의 시작을 선언하는 작품인 아비뇽의 처녀들과 게르니카가 있다.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왼쪽), (게르니카, 오른쪽), 출처 : 나무위키

추상미술(회의주의) : 입체주의는 그림의 대상을 분석하고 새롭게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으나, 어쨌든 특정 대상을 그린다는 면에서는 구상 미술의 오랜 전통을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20세기 무렵 아예 그림의 대상을 그림에서 제거하는 추상미술의 화풍이 탄생했다. 추상미술의 탄생으로 미술은 이제 구상미술과 추상미술로 구분되었다. 순수추상미술의 시작으로 평가되는 화가는 러시아 출생의 칸딘스키다. 그는 실재하는 대상을 화폭에서 완벽하게 제거하고, 색의 덩어리와 단순한 선과 면으로 시각적인 효과를 강조했다. 

칸딘스키 (노랑 빨강 파랑), 출처 : 지대넓얕2 part3 예술 책일부 발췌

그는 색이 영혼의 떨림을 준다고 말할 정도로 대상을 제외한 순수한 추상이 인간의 감정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봤다. 추상미술은 세계대전동안 주춤하다가 1940년대 이후가 되면서 미국에서 추상표현주의로 발전하여 현대 미술을 주도하게 되었다. 

9) 오늘날의 미술 : 예술의 주체를 흔들다, 현대 미술의 주요한 두 화풍으로서 입체주의와 추상미술은 기존 미술 역사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연장선이란 회화의 대상에 대한 변화와 소멸이다. 미술의 역사에서 새로움을 찾는 시도는 언제나 미술의 대상과 관련되어 있었다. 대상의 선택과 표현의 역사가 미술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현대 미술은 그동안 작품 밖에 작품을 제작하는 화가를 예술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인다. 오늘날의 미술은 미술의 주체를 흔드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주체를 흔드는 방법은 다양하다. 첫 번째 방법은 화가의 행위 자체를 예술로 규정함으로써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잭슨 폴록은 액션페인팅을 하였고 행위 자체가 하나의 예술 범위로 평가되었다. 오늘날까지 많은 예술가가 퍼포먼스 형태의 예술을 줄기차게 진행하고 있는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미술을 하는 행위를 예술로 포함하는 예술사적 맥락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

주제를 흔드는 두번째 방법은 주체를 아예 없애는 것이다. 이를 자동기술법, 혹은 자동묘법이라고 부른다. 주체를 정말로 아예 없앨 수는 없고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무의식적인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손이 움직이는 대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말한다. 독일 출신의 초현실주의자였던 막스 에른스트는 작품 활동 초기에 종이 위에 물감을 짜서 반을 접었다가 펴는 데칼코마니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작가의 이성적 의식이 작품에 반영되지 않는 자동기술법에 따른 활동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주체를 흔드는 세번째 방법은 주체를 집단화 하는 것이다. 요즘 미술 전시회에 가보면 예전의 전시회와는 달리 품위있게 감상할 수있는 기회가 드믈다. 안내하는 사람들이 자꾸만 작품들을 만져보라고 하고 어디가서 서 있어보라고 하는 등 감상자가 작품을 경험하고 작품의 일부가 되도록 한다. 이것은 다수가 작품에 참여하고 그로써 작품을 완성해나가는 과정이다. 오늘날의 예술가들이 이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은 예술가라는 주체를 변형하려는 현대 미술의 맥락을 토대로 한다. 

현대 미술을 단적으로 정리해보면, 미의 추구라기보다는 새로움의 추구다. 그리고 새로움을 추구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우선 예술의 대상을 변화시켰고, 다음으로 예술의 주체를 변화시켰다. 그리고 일부 예술가들과 평론가들은 예술의 의미를 탐구하는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기도 했다. 현대 예술의 다양성 속에서 예술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에 대해 평론가들과 예술가들이 논평과 퍼포먼스로 그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현대 미술을 접하면 두 가지를 기억하면 되겠다. "새로운 무엇인가를 시도하고 있구나.", "예술의 대상, 주체, 의미 중에서 무엇을 흔들고 있는 것이지?" 

* 최종 정리

미술사의 큰 흐름은 세 가지로 구분된다. 우선 보편적 이성을 중시하는 절대주의 예술관이 있다. 다음으로 이와 대비되는 주관적 감성을 중시하는 상대주의 예술관이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현대에 이르러 절대주의, 상대주의 예술관을 모두 거부하고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회의주의 예술관이 있다. 이성과 합리성 그리고 완벽한 이상을 추구하는 절대주의적 입장은 그 기원을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찾는다. 이후 종교적 성향이 강했던 중세 그리스도교 미술을 지나 르네상스 미술로 이어졌다. 르네상스 미술은 이후 신고전주의로 이어졌는데, 르네상스나 신고전주의나 모두 고대 그리스-로마의 미술을 이상적인 미술로 상정하고 이를 복구하는데 주력했다. 

이러한 이성주의적 미술에 대한 반발로 개인의 주관과 감성을 중시하고 변화하는 세계를 화폭에 담으려는 상대주의 입장이 나타났다. 르네상스 시기에 등장한 바로크, 로코코 미술은 이성적인 르네상스 미술에 반기를 들고 유연하고 화려한 미술을 추구했다. 이러한 감성 ㅈ웃김의 미술은 이후 낭만주의로 이어져 화가 내면의 주관성과 표현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근대에 이르면 낭만주의의 비현실성에 반발하여 삶의 현실을 미술의 대상으로 하는 사실주의가 탄생했고, 동시에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무거움과 역사성에서 벗어나 순간의 인상을 포착하려는 인상주의가 등장했다. 인상주의는 이후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인 세잔에 이르러 미술의 대상을 분석하고 관점을 다양화함으로써 현대 미술이 탄생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되었다. 

현대에 이르면 미술은 더이상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의 싸움이 아니라, 예전 것들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들을 실험하는 회의주의적 창조의 장으로 바뀐다. 세잔의 예술적 전말을 이어받아 입체파가 등장했고, 입체주의가 대상을 해체함으로써 새로움을 추구했던 방식은 더욱 극단화되어 추상미술이 자리잡을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오늘날에는 예술의 대상에 대한 분석과 해체를 넘어 주체로서의 예술가를 대상화, 소거, 집단화하는 방향으로 예술의 새로운 길이 실험되고 있는 상황이다.

예술의 역사 정리, 출처 : 지대넓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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