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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엔드 오브 타임 part7 [두뇌와 믿음 : 상상에서 신성으로]

by Utnapishtim 2023.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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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그린이 말하는 세상의 시작과 진화 그리고 끝

7. 두뇌와 믿음 : 상상에서 신성으로 

인류는 지능이 높아지면서 바깥 세계를 탐험하고 이해하려는 욕구가 강해졌고, 경험이 쌓여가면서 모든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또한 우리 선조들은 생존을 위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야만 했다. 그들은 돌과 청동, 그리고 철을 다루는 법을 알아야 했고, 사냥, 집단생활, 농사를 배워야 했다. 그러나 생존 기술을 익히는 와중에도 그들은 지금 우리처럼 만물의 기원과 의미, 그리고 존재의 목적을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물론 생존도 중요하지만, 자연에서 생존하려면 생존이 왜 중요한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기술을 개발하던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철학자가 되었고 과학자가 되었으며, 신학자, 작가, 작곡가, 음악가, 예술가, 시인이 되었다. 또한 식량 문제가 해결된 후 마음속에 떠오르는 심오한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오만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 여기서 얻은 통찰을 창조적인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도 있었다. 오래된 이야기와 신화에서 알 수 있듯이, 가장 끈질기게 떠오른 질문은 다분히 실존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끝날 것인가?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존재하게 되었으며, 죽은 후에는 어디로 가는가? 다른 세상은 정말로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디에 있으며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다른 세상에 대한 상상 : 지금으로부터 10만 년 전 현재 이스라엘의 남부 갈릴리 지방에서 네다섯살 된 아이가 놀다가 머리를 크게 다쳤다. 성별은 알 수 없지만 그 아이는 오른쪽 이마를 크게 다쳐 심각한 뇌손상을 입었음에도 열두세살까지 살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지 중 하나인 카프제에서 1930년 대부터 발굴을 시도하다가 알려진 사실이다. 이곳에서는 26구의 유골이 발견되었지만 고고학자들이 관심을 끈 것은 단연 소녀의 유골이었다. 이유는 유골의 가슴 부위에는 사슴 두 마리의 뿔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뿔의 한쪽 끝이 아이의 손에 쥐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소녀가 이곳에서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후 모종의 의식을 치른 후 매장되었다고 결론지었다. 고고학자들은 10만 년 전 인류는 죽음의 의미와 사후 세계를 깊이 생각했으며, 카프제 11 유적지는 소녀의 죽음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장례를 치른 흔적이라고 결론 지었다. 물론 이 결론이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카프제보다 나중에 형성된 유적지에는 장례의 흔적이 더욱 뚜렷히 남아 있다.

인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19세기 영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는 초기 인류가 사후 세계의 개념을 떠올리게 된 원인이 꿈이라고 주장했다. 매일 밤마다 기이하고 유별난 이탈을 겪으면서 눈에 보이는 세상 외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좋은 꿈이건, 악몽이건 간에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이나 친구를 꿈에서 만났다가 깨어나면 그들이 어딘가에 아직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떤 미묘한 통로를 통해 그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고대인이 남긴 문헌을 해석해보면, 그들은 꿈을 다른 세계로 가는 창문으로 해석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수메르인과 이집트인은 꿈을 신과 접촉하는 통로라고 믿었으며, 구약과 신약 성서에서도 신의 계시는 주로 꿈속에서 이뤄진다. 현대에도 고립된 사회에서 사냥하며 살아가는 호주 원주민들에게 드림타임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자 최종적으로 돌아갈 곳을 의미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은 깨어 있는 동안에도 사방에 존재한다. 지구와 하늘에 작용하는 강력한 힘(중력)과 예측하기 어려운 일상적인 사건들, 그리고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 요소들이 그 대표적 사례다. 집단 속에서 성공적으로 진화해 온 우리는 여럿이 함께 겪은 사건의 원인을 다른 존재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다. 우리 선조들은 번개가 치거나 강물이 범람하거나 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어떤 생각하는 존재가 이런 일을 일으킨다고 생각해왔다. 그들은 불확실한 세상에서 자신의 한계를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막강한 힘을 휘두르는 존재를 떠올렸다. 의도적이었던 무의식적이었던 간에, 그것은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 대부분의 원인을 하나의 존재에게 돌리면 무작위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일관된 관점에서 서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대인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인간의 행동을 감시하고 운명을 좌우하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만들어 냈고, 친숙한 성격에 걸맞는 외모와 이름까지 부여했다. 흥미로운 점은 초월적 존재들에게 약점과 원한, 질투 등 인간적인 특성을 부여하여, 인간 세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을 다분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풀어냈다는 점이다. 고대인이 남긴 예술품을 보면 그들이 내세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탐험가들이 암벽에서 발견한 벽화는 수천 개가 넘고 그중에는 4만 년 이상 된 것도 있다. 그림의 내용도 다양하여 온갖 동물들과 희귀한 변종들이 등장하며 사람도 있긴 하지만 정교한 인물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 벽화를 보고 과도한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고대인의 미적 충동으로 낳은 예술적인 작품일 수 도 있기 때문이다.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그런데 각기 다른 대륙에서 수천 년의 시간 차를 두고 그린 벽화들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것을 보면, 모두 하나의 기원에서 탄생했다는 주장이 그럴 듯하게 들리기도 한다.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일 수도 있겠지만, 고고학자 벤저민 스미스의 생각은 확고하다. "동굴은 단순한 캔버스가 아니라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조상들의 영혼과 소통하는 장소로서, 삶과 죽음의 의미와 영혼의 공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스미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면 우리 조상들은 예술과 의식을 통해 영적인 존재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과거로 갈수록 증거는 희미해지므로 고대인이 벽화를 진짜 남긴 이류를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확보한 증거를 종합해보면 뚜렷한 일관성이 보인다. 우리 조상들은 죽은 사람을 다른 세상에 보내기 위해 정성껏 장례를 치렀고, 현실적인 경험을 초월한 상상의 세계를 벽화로 남겼으며,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와 불멸, 그리고 사후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후대에 전수했다. 간단히 말해서 훗날 종교라고 일컬어질 사상적 요소들이 도처에서 발생하여 자연스럽게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종교의 진화적 뿌리 : 고대에 싹튼 종교적 관념에 기초하여 오늘날 종교가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진 이유를 설명이 가능한가? 파스칼 보이어를 비롯한 인지과학자들은 그렇다고 단언한다. 보이어는 모든 종교에 균일하게 적용되는 진화적 기초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종교적 신념을 갖게 된 것은 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았거나 독실한 마음을 낳는 신체 기관 때문이 아니라, 진화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장구한 세월 동안 투쟁해 왔기 때문이다. 보이어는 인지과학자와 심리학자들이 최근 수십 년에 걸쳐 개발한 두뇌 이론에 기초하여 인간의 뇌를 컴퓨터에 비유했다. 물론 프로그램이 입력되는 대로 묵묵히 수행하는 범용 컴퓨터가 아니라, 자연선택을 통해 생존과 번식에 특화된 특수 컴퓨터다. 보이어는 사냥과 번식, 그리고 자기편 만들기(친화력)를 수행하는 신경학적 과정을 추론시스템이라고 불렀다. 이 시스템의 성능에 따라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할 수 있는 개체와 그렇지 못한 개체가 결정된다. 보이어가 제안한 가설의 핵심은 이 추론시스템이 고대인의 종교적 기질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마음을 설명하는 이론에 의하면 우리는 내면에서 겪은 일의 원인을 바깥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외부의 작용을 과대평가하는 습성은 진화에서 유리하게 작용하여 성공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고,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을 주시하는 존재들이 주변에 가득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보이어의 추론시스템에는 심리학과 물리학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능력도 포함된다. 우리는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아도 마음과 신체의 기본 능력을 파악할 수 있다. 여기에 반직관적인 요소를 최소화한 개념이 추가되면 인간이 영혼이나 신같은 개념에 집착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정상적인 뇌에는 타인과의 관계를 기억하는 추론시스템이 탑재되어 있어서, 공정한 관계가 유지되도록 우리의 행동을 조절한다. 내가 당신에게 호의를 베풀면 당신도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인간 관계 장부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나의 호의를 잊었다간 어떤 형태로든 대가를 치를 것이다. 초자연적인 존재와 인간 사이에 맺어진 계약관계는 방금 언급한 사람들 사이의 상호-이타적 관계로부터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개념은 보이어의 저서 종교해설과 다른 학자들의 논문을 통해 자세히 분석되었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생존 경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둔 두뇌는 종교를 포용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것이 앞서 말했던 패키지 진화의 또다른 사례다. 종교적 믿음이 생존 경쟁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하나의 습성으로 굳어진 것은 적응력을 높여주는 다른 기능과 패키지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인간이 종교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진화를 통해서 단 것을 좋아하는 습성이 생겼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설탕 바른 도넛을 좋아하지 않는 것과 같다. 보이어가 말한 종교를 포용하는 특성이란 두뇌의 추론시스템이 종교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공감 능력 덕분에 고대인의 종교적 습성은 세계적 규모의 종교 단체로 발전할 수 있었다. 신이건 악마이건 영혼이건 간에 종교적 상상은 마음의 진화를 견인해온 지휘자였다. 사람들이 종교에 관심을 갖고 교리에 따라 행동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다 보니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보이어를 비롯한 여러 인류학자들은 종교의 역할을 부정하지 않지만, 종교 자체로는 종교의 기원과 특성을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종교에서 마음의 역할은 누구나 느끼고 있지만 대놓고 말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진화를 통해 형성된 마음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종교가 우리의 삶에 깊이 파고든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보이어의 이론은 꽤 그럴듯하지만 복잡하기 그지 없는 두뇌와 마음, 그리고 문화의 기원과 특성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결론을 내리기엔 뭔가 부족하다. 게다가 인간이 종교적 사고를 하게 된 이유를 인지과학적으로 설명한다 해도, 종교가 진화의 부산물이 아닐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다른 과학자들의 주장대로, 종교가 널리 퍼진 것은 인간의 적응력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집단을 위한 개인의 희생 :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우리의 조상은 구성원이 많아지면서 어떤 문제에 직면했다. 계속 집단이 커지는 동안 각 개인의 협동 정신과 집단에 대한 충성심은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친족으로 이뤄진 집단의 경우에는 다윈과 로널드 피셔, 홀데인, 해밀턴 등이 제안한 자연선택이론으로 자연스럽게 설명이 가능하다. 내가 나의 형제와 아이들, 그리고 가까운 친척들에게 헌신하는 이유는 중요한 유전자를 그들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친족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면 나와 동일한 유전자가 후대에 전달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다윈의 표준 진화론에 따르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친족으로 보호하려는 본능이 강한 개체는 자연에 의한 선택될 확률이 높고, 그의 후손 중 상당수는 여전히 친족 보호 본능을 갖고 있다. 여기까지는 매우 논리적인데, 공동 생활을 하는 집단의 규모가 친족을 훨씬 능가하는 경우, 집단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도록 유도하는 유전적 이점이 존재할 것인가? 중요한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는 타인을 위해 나를 희생하면 어떤 이득을 얻게 되는가? 모든 개인이 집단을 위해 자발적으로 희생하도록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집단끼리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개인의 충성심이 필요하다. 이로 집단이 승리할 경우, 개인의 유전자는 후대에 전달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집단의 모든 구성원을 자기 친족처럼 여기도록 만들면 된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나? 앞서 말한대로, 우리의 조상은 이야기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생존 능력을 높여 왔다. 진화생물학자 데이비드 슬론 윌슨을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20세기 초에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 제안한 이론을 발전시켜서 사회적 결속의 원동력을 설명한 바 있다. 종교는 교리와 의식, 관습, 상징, 예술, 그리고 행동 지침이 강조된 하나의 이야기로서 종교적 행동에 신성함을 부여하고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 정서적 충성심을 확립하여 가족못지 않은 결속력을 발휘하게 만들었다. 종교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가족이 아니어도 강한 소속감을 느낀다. 유전적으로 별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뭉쳐서 함께 일하고 서로 보호하게 된 것이다. 이런 협력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인간이라는 종이 널리 퍼질 수 있었던 것은 여럿이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 책임을 분담하면서 공동생활의 효율을 높여왔기 때문이다. 고대에 종교로 뭉친 집단은 사회적 결속이 단단하여 강력한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개인이 사회에 적응하는데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이 논리는 격한 논쟁을 불러왔는데, 일부 학자들은 누군가가 집단의 유대를 진화론적으로 설명할 때마다 적응가치가 불분명한 친사회적 행동을 전면으로 내세운 진부한 설명이라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사실 협동의 적응가치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협동을 전제로 모인 집단에서 한 개인이 이기적인 마음을 먹으면 혼자서 많은 이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결속에 종교가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믿는 학자들은 이 점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고립된 집단에서는 이기적인 행동으로 이득을 볼 수 있지만, 우리의 주된 관심사인 홍적세의 수렵/채집인 무리는 고립된 집단 생활을 하지 않았다. 이들은 집단끼리 거래를 했고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서로 싸우기도 했다. 고고학적 기록에 의하면 이들의 전쟁은 매우 치명적이어서, 전쟁에 진 부족은 몰살당하는 것이 일상사였다고 한다. 그런데 집단에 헌신하는 사람이 많은 부족일 수록 전쟁에서 이길 확률이 높고,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남길 기회도 그만큼 많아진다. 다윈은 그의 저서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에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같은 지역에서 살아가는 두 고대인 부족이 경쟁 관계에 놓이면 용감하고 호의적이면서 충직한 구성원이 많을수록 이길 가능성이 높다. 전쟁중에는 동료를 보호하고 위험에서 구하려는 동료애가 승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미 세상을 떠난 조상이나 신을 섬기면서 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이라면 집단의 이익을 지키는 데 더욱 열정적으로 헌신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유전적 특질이 광범위하게 퍼졌는지 규명하려면 이기적인 행동 뿐만 아니라 협동을 선호하는 기질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지난 수천 세대에 걸쳐 집단의 생존이 개인의 생존 여부를 좌우해왔다면, 종교를 통해 결속을 유지한 집단이 궁극의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을 뿐이며, 수렵/채집인의 삶과 죽음을 지배한 원리는 아직 확실치 않다. 회의론자들은 협동 정신의 기원을 게임이론이라는 수학에서 찾고 있다. 임의의 집단에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거나 극단적으로 이타적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두 극단 사이에서 다양한 생존 전략을 구사한다. 

전문가들은 수학적 분석과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수많은 전략 중 가장 뛰어난 것을 골라내는 데 성공했다. '네가 나에게 호의를 베푼다면 나도 너에게 호의를 베풀겠다. 하지만 네가 불공정한 행동을 한다면 곧바로 보복하겠다'는 전략이 바로 그것이다. 이론에 의하면 이런 처세술의 생존 확률이 가장 높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 실험을 기초하여 "집단 안에서의 협동 정신은 종교적 믿음을 공유하지 않아도 자연선택에 의해 널리 퍼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이후로도 수많은 논쟁이 존재했고 지금은 논쟁이 끝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지자와 반대론자 모두 끝났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홍적세에 종교가 사회적 결속에 어느 정도 공헌했는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있다. 사실 이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이며 종교는 매혹적인 이야기와 신성한 존재로 숭배하는 경향을 낳았고, 예상 밖의 결과를 설명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 왔다. 또한 고대인은 종교적 의식을 통해 공동체의 안전을 도모하고 위안감을 얻었다. 그러나 종교의 기원을 밝히기에는 데이터가 많이 부족하므로 앞으로도 논쟁은 계속될 것이다. 

개인의 적응과 종교 : 미국의 심리학자 제시 베링은 언어의 기원을 연구하다가 가십(험담)이 "집단의 위계질서를 유지하고 아이를 양육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결론 지었다. 현대인이 품위없는 수다정도로 여기는 가십을 고대 종교의 적응 기능의 핵심으로 내세운 것이다. 인류가 언어를 사용하기 전에는 누군가가 나쁜 마음을 먹고 음식을 훔치거나, 짝짓기 상대를 가로채거나, 사냥 중에 혼자 도망가도 증인이 많지 않으면 벌을 주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이 상황은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달라졌다. 누구든지 잘못을 한 번만 저질러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면 신뢰도가 급격히 떨어져서 번식의 기회가 크게 줄어들었다. 베링의 논리로 보면 집단의 규율을 위반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고 상상하면 범법 행위를 자제하게 되고, 가십에 오르는 휫수가 줄어들고, 집단에서 추방될 확률도 낮아진다. 따라서 그는 안전하게 후손을 낳을 수 있으며, 그 후손들도 신을 두려워하는 습성을 물려받아 규율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즉, 종교적 성향은 혈통을 유지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세대가 거듭될 수록 종교에 심취되고 인원수도 많아진다는 것이다.   

베링은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실험했다. 실험자가 아이들을 방에 모아놓고 까다로운 과제를 내 주고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을 알려준 후 밖으로 나간다. 과연 아이들은 규칙을 지키면서 과제를 수행할 수 있을까? 결과는 모두가 예상했듯이 대부분의 아이들이 규칙을 어기고 쉬운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실험자가 일부 아이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지만 너희를 감시하는 사람이 있다"라고 경고했더니, 그 아이들의 대부분은 끝까지 규칙을 지켰다. 베링은 아이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감시자를 의식하여 충동을 자제한다고 결론지었다. 고대에도 "전능한 존재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라고 상상하면 친사회적인 행동을 하게 됨으로써 좋은 평판을 유지하고 번식의 기회를 높일 수 있었으며, 이런 기질이 여러 세대를 걸쳐 전수되면서 널리 퍼져나갔을 것이다. 

실험에 기초하여 사회심리학을 연구해 온 학자들은 어니스트 베커 저서 중 1장의 주제 죽음의 부정의 연구를 한 단계 더 발전시켜서 종교의 또 다른 적응 기능을 제시했다. 이들의 주장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공포감이 생물학적 원형질의 상당 부분을 빠르게 감퇴시킨다. 그러나 현실적이건 상징적이건 죽은 후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보장이 있으면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다. 베커는 우리의 선조들이 초자연적존재를 소환하여 죽음에 대한 공포를 완화시킨 것이 혁신적인 발생이라고 주장했다. 단명한 삶의 고뇌에서 벗어나려면 효과가 영원히 지속되는 완화제가 필요하다. 물론 이런 것은 현실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강인한 육체를 가진 고대인이 사바나 초원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죽음을 떠올리면서 공포에 휩싸인 모습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심리학자들은 기발한 실험을 통해 현대인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한 가지 예로 한 실험자가 애리조나주의 판사들을 대상으로 "경범죄로 기소된 피고인들에게 적절한 벌금을 산출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들은 먼저 설문지를 작성한 후 금액을 산출하도록 부탁 받았는데, 피실험자(판사)의 50%에게는 자신의 성격을 묻는 평범한 설문지를 돌렸고, 나머지 50%에게는 평범한 질문과 함께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질문을 제시했다.(자신이 곧 죽는다고 생각하면 어떤 감정이 떠오르는가? 등등) 법은 무질서와 위험요소를 방지하기 위한 사회적 안전장치이므로, 실험자는 궁극적 위험(자신의 죽음)을 떠올린 판사들이 좀 더 가혹한 벌을 주리라 예상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들의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 들어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두 실험 집단에서 책정한 벌금의 액수가 예상외로 큰 차이를 보였다는 것이다. 죽음을 떠올린 판사들이 책정한 평균 벌금은 그렇지 않는 판사들이 제시한 벌금보다도 무려 9배나 많았다. 이 실험을 진행한 학자들은 "법치 정신과 공정성에 투절한 사람이 죽음이라는 극단적 상황에 조금만 노출되어도 큰영향을 받는다면, 우리도 부지불식간에 이와 비슷한 영향을 받고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 후 피실험자의 국적과 직업, 죽음을 상기시키는 방법 등을 바꿔가며 수백 건의 후속 실험을 진행했는데 거의 예외없이 동일한 결론이 내려졌다. 베커는 이 실험 결과를 두고 인류의 문화가 죽음을 떠올릴 때 마다 무력해지는 심리를 경감시키는 쪽으로 진화해왔다는 증거라고 했다. 여기서 종교의 기원에 대해서 말할 때 제일 언급됐던 파스칼 보이어는 위에서 말한 종교의 역할을 부정하면서 "종교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없는 현실 못지않게 두려운 세계이며, 대부분의 종교는 암울한 현실에 별로 위안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베커의 지지자나 그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 보이어의 생각과 달리, 종교적 감수성은 별로 극적이지 않은 소소한 이득을 가져다 주었을 수도 있다. 아마도 고대 종교는 죽음을 별로 강조하지 않고, 일상속에서 생명력이 강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파되었을 것이다.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란 안전을 보장하고 평화적 기질을 함양하는 수단이며, 서정적 매력이나 정직함, 또는 영웅적 행위의 형태로 삶에 주어진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종교는 어떻게 탄생했으며 그 장구한 세월동안 어떻게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수많은 학자들이 풀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아직도 답을 얻지 못했다. 아이디어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종교는 자연선택된 뇌를 포용하고, 집단의 결속을 유도하고, 불안감을 해소하며 개인의 평판과 번식의 기회를 높여주었다.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인간의 두뇌용량이 커짐에 따라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모든 종교는 인간이 죽음을 인식하면서 탄생했다"고 했다. 그러나 종교가 죽음에 대한 인식을 적응이 유리한 쪽으로 바꿔놓았는지를 따지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우리의 정교한 두뇌는 다양한 생각과 행동을 창출한다. 그중에는 생존과 직결된 것도 있고, 그렇지 않는 것도 있다. 인간은 이러한 행동을 통해 종교를 유지해 왔으며, 수천 년 사이에 세계적 규모로 확장시켰다. 

종교의 뿌리 : 기원전 1천 년 동안 인도와 중국, 그리고 고대 유대 지역에서 창의력이 풍부한 사상가들이 고대 신화와 삶의 방식을 재해석하여 다양한 사상 체계를 확립했다.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이것을 "현존하는 모든 종교의 시작"이라고 했다. 학자들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탕생한 사상들의 상호 연관성을 놓고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이들 사이에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추종자들이 깊은 통찰력을 발휘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선지자들이 정해 놓은 성스러운 훈령이 여러 세대를 거쳐 구전되어 오다가 하나의 체계로 통합되면서, 종교는 점점 더 조직된 단체로 발전했다. 물론 경전의 내용은 종교마다 각양각색이지만, 그 안에서 제기된 질문은 거의 비슷하다.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다양한 종교가 탄생하였지만, 공통점은 신비주의이다.

현존하는 경전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베다로서, 그 기원은 기원전 1500여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베다는 기원전 8세기 경에 쓰인 우파니샤드와 함께 힌두교를 대표하는 경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시와 만트라(주문), 그리고 신성한 내용이 담긴 운문으로 가득 차 있다. 현재 힌두교도는 약 11억명으로 세계 인구의 1/7이나 된다. (필자의 형이 베다에 심취하여 힌두교에 몰두하였으며 필자 또한 이 영향으로 동양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베다의 사상은 범아일여 사상으로 우주와 자아는 하나라는 일원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필자는 베다를 읽으면서 모든 인간이 현실의 리듬을 느끼고 싶어한다는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베다에는 필자가 수학적으로 연구해온 우주가 훨씬 큰 규모로 아름답게 서술되어 있다. 시작의 시작과 시간 이전의 시간 같은 난해한 개념들이 한 편의 시를 연상케 하는 운문 속에서 은유적으로 녹아있어서, 별들이 반짝이는 밤에 모박불을 피워놓고 여럿이 모여 앉아 베다를 읊다 보면 자연스럽게 명상에 빠지면서 우주와 합일된 사상에 도달할 수 있을거 같다. 베다에서는 자연에서 패턴을 찾고, 설명을 원하고, 생존을 위해 싸워온 인간의 마음이 반영되어 있어서, 삶의 지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누군가 필자에게 물리학의 목적이 뭐냐고 묻는다면 종교와 물리학은 일상적인 경험을 넘어선 곳에서 불변의 진리를 찾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라고 답을 제시한다. 

기원전 6세기 중반 인도 북동부의 카필라 왕국에서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왕자가 태어났다. 그는 궁전에서 베다를 배우며 풍족하게 살았으나 평민이 온갖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스물 아홉 살이 되던 해에 출가를 시도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포기하고, 일체의 고통과 번뇌를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 이후 싯다르타가 깨달은 내용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제자들을 통해서 세간에 알려지면서 불교의 시초가 되었다. 현재 불교를 믿는 사람은 전 세계 5억명이나 된다. 대부분의 종교가 그렇듯 불교도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여러 종파로 갈라졌지만, 현실은 지각이 낳은 환상에 불과하다라는 공통된 믿음만은 충실히 전수되었다. 이 세상은 안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든 만물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베다철학에서 갈라져 나온 불교는 '불변의 기질'이라는 개념을 부정하고 인간이 고통 속에서 사는 이유는 모든 것이 일시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번뇌에서 해방되려면 진리를 올바르게 인식해야 하고, 이 원대한 목적을 이루려면 탄생과 죽음을 반복해야 한다. 수많은 윤회를 거치면서 모든 욕망과 고통을 잠재우고 자신마저 초월한 상태에 도달하면 드디어 윤회의 사슬을 끊고 영원한 천상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고대인이 사후 세계를 떠올린 것이 필멸이라는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정신적 전략이었다면, 힌두교와 불교는 그 최상급이라 할 만하다. 이 가르침에 의하면 죽음은 삶의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순환 과정의 하나일 뿐이며, 윤회에서 벗아나면 존재라는 개념조차 없는 영원한 세계로 진입한다. 우리의 단명한 삶은 영원의 세계로 가는 신성한 통과 의례인 셈이다. 힌두교와 불교는 일상적인 관념의 환영을 넘어선 진실을 추구하기 때문에, 지난 100년 사이에 발견된 현대 과학과 일맥상통하는 부부이 있다. 얼마 전부터 동양종교와 현대물리학을 연결하는 기사와 책, 영화 등이 크게 유행한 것도 힌두교와 불교의 신비로운 특성과 무관치 않다. 두 분야는 관점과 언어가 비슷하지만 필자는 모호하게 해석된 개념들 사이의 은유적 유사성만 발견하였을 뿐, 직접적인 관계를 확인한 적이 없다고 한다. 누가 뭐라해도 과학의 기초는 단연 수학이며 단어를 아무리 신중하게 골라도, 결국 방정식을 일상적인 언어로 번역한 것 뿐이다. 이런 식의 설명에 기초하여 다른 분야와 접촉을 시도한다면 기껏해야 시적인 융합을 벗어나지 못한다. 필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적 지도자들도 단순하고 대담하면서 솔직한 자신만의 모범을 따른다는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붓다가 인도를 돌아다며 중생을 제도하던 무렵, 유다왕국의 유대인은 바빌로니아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바빌론에 억류되었다. 당시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사방에서 흩어져 있던 문헌과 구전되던 이야기를 집대성하여 히브리 성서의 초기 버전을 완성했다. 훗날 구약 성서로 불리게 될 이 문헌은 아브라함계 종교의 성스러운 경전이 되었으며, 지금은 세계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40억 명이 여기 수록된 지침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신은 모든 곳에 존재하는 전지전능한 신이자 만물을 창조한 창조주이며, 사람들이 종교를 논할 때마다 머릿속에 떠올리는 지배적 개념이기도 하다. 

구약 성서의 첫머리에는 세상의 기원이 두 가지 이야기로 서술되어 있다. 첫 번째는 조물주가 처음 6일동안 하늘과 땅, 낮과 밤,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한 이야기이고, 두 번째는 단 하루 만에 흙을 빚어 남자(아담)를 만든 후 그가 잠든 사이에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이브)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그 뒤에는 아담의 후손들과 그들의 수명, 그리고 복잡한 족보 관계가 이어지지만 그들이 죽은 후 어디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이 없다. 부활에 관한 이야기가 한두 차례 언급될 뿐, 생선에 나를 잘 섬기면 죽은 후 하늘나라로 데러가겠다는 식의 사후 세계에 대한 공약이 없는 것이다. 유대교의 신비주의자들과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들은 다른 세계를 기다리는 불멸의 영혼과 관련하여 수많은 개념과 이야기를 만들어 냈는데, 이 모든 것을 통합하는 하나의 설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부터 약 500년 후, 기독교인은 죽은 후에도 영혼이 존재한다는 교리를 만들어서 사후 세계에 대해한 불확실성을 걷어냈고, 다시 500년이 지난 후에 이슬람교도 의로운 자는 심판의 날에 죽음에서 살아나 하늘에서 영생을 누리고, 악한자는 영원한 저주를 받는다는 교리를 도입했다. 위에서 언급한 종교는 신도수를 모두 합하면 세계 인구의 3/4(75%)이나 된다. 같은 종교를 믿는다 해도 가르침을 실천하는 방법은 개인마다 조금씩 다르다. 게다가 종교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소규모 종교 단체는 세계적으로 거의 4천 종에 달한다. 이는 곧 종교를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압도적으로 많고, 종교적 수행 방법도 엄청나게 다양하다는 의미다. 그러나 모든 종교는 중요한 질문에 비슷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신도들에게 신성함을 존중하는 마음 자세를 갖도록 권장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간단히 말해서 이 세상은 바람직한 삶의 방식을 알려주는 이야기와 바람직한 행동을 안내하는 지침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은 종교의 교리와 연결되어 신도들의 마음에 굳건한 믿음을 만들어 낸다. 

무언가를 믿고 싶은 마음 : 필자는 한 종교단체로부터 강연을 부탁 받았고 멋모르고 수락을 했다. 이 단체는 말도 안되는 행위들을 하면서 수련을 통해 투시법이나 텔레파시를 통해서 물체를 알아맞히는 수행을 한다고 했다. 이에 필자는 아래와 같은 패턴 인식과 생존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을 하게 되었다. 

인간은 옛날부터 주변 환경에서 패턴을 찾아왔다. 패턴 인식은 여러 면에서 아주 유용하기 때문이다. 여러 세대에 걸친 자연선택을 통해 인간은 사람과 물체의 외관에 나타난 몇 가지 특징만으로 향후 모습과 거동을 판단하는 쪽으로 진화해왔다. 고대인은 동물의 행동 패턴을 관찰하여 가까이 가도 괜찮은지 아니면 피해가야 할지를 판단했고, 허공으로 던져진 돌맹이나 창이 그리는 궤적의 패턴을 파악하여 먹이를 구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인간은 패턴 인식을 통해 소통 수단을 개발했고, 종족이나 국가처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을 구성할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패턴 인식은 생존과 직결괸 능력이다. 그러나 가끔은 이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엉뚱한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몸에 내장된 패턴 감지 장치가 과도하게 반응하여, 아무런 관계도 없는 패턴들 사이에 상호관계가 존재한다고 믿은 것이다. 가끔은 무의미한 것에 의미를 부여할 때도 있는데, 수학적으로 따지면 우리는 트럼프 카드에서 네 번에 한 번 꼴로 카드의 무늬를 맞출 수 있고, 열세번에 한번은 숫자를 맞출 수 있다. 이것은 텔레파시가 아니라 단순한 확률이다. 눈을 가리고 아무렇게나 걷다가 아주 가끔은 자신이 적어놓은 쪽지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것은 꿈의 실현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나는 묻고 싶다. 여러분은 기적적인 일치가 일어나지 않는 경우를 얼마나 자주 보았는지?

여기까지 말하자 강당에 모인 청중들에게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다고 한다. 그중엔 기립박수를 보낸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그들이 바깥 세상에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모여 있는 것이라고 알게 되자 그도 동일하게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잘 안다고 했다. 물리학의 역사는 바깥 세계에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론과 실험으로 규명해 온 발견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끔은 새로 발견된 것이 심하게 낯설고 기이해서, 현실 세계에 대한 기존의 이해 방식을 송두리째 갈아엎은 적도 있다. 현재의 이론이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제아무리 정확하게 설명한다 해도,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면 얼마든지 뒷전으로 밀려날 수 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며 앞으로도 여러번 반복 될 것이다. 물리학 분야에서 새로운 발견은 거의 예외없이 수백 년 동안 갈고 닦아 온 전통적인 방법을 통해 이루어졌다. 과학 연구의 기초는 누가 뭐래도 수학과 실험이다. 이것은 동료나 후배에게 과학적 지식을 전수하는 수단이자 숨은 진리를 찾는 능력이 입증된 유일한 도구이기도 하다.

이 시점에서 떠오르는 질문 하나는 우주를 창조하고, 우리의 기도에 반응하며 우리의 모든 언행을 감시하고 결과에 따라 상벌을 내리는 전지전능한 존재를 믿을 만한 근거가 있는가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선 믿음이라는 개념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의해야 한다. 

믿음과 신뢰, 그리고 가치 : 필자에게 신의 존재를 믿느냐고 묻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믿음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양자역학에 대한 나의 믿음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가끔은 "양자역학을 믿는 것처럼 신을 믿습니까?" 라고 직설적으로 질문하는 사람도 있다. 필자가 양자역학을 믿는 이유는 수학적 이론과 실험이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전자 쌍극자모멘트는 이론으로 계산된 값과 실험실에서 측정한 값이 소수점 9번째 자리까지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러나 신에 대해서는 정확한 데이터가 부족하기 때문에 양자역학만큼 신뢰가 가지 않는다. 모름지기 신뢰란 주어진 증거를 냉정하게 판단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물리학자는 데이터 분석 결과를 발표할 때, 이미 검증된 수학적 논리를 이용하여 신뢰도를 숫자로 명시한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발견했다"라고 주장하려면 신뢰도의 수치는 수학적 임계값을 넘어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통계적으로 얻은 결과가 틀릴 확률이 350만분의 1을 넘지 않아야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물론 이 조건을 만족한다 하더라도 새로운 발견이라는 보장은 없으며, 후속 실험에서 얻은 데이터에 대한 신뢰도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 경우에도 달라진 정도를 결정하는 기준은 단연 수학이다. 물론 일상적인 경험에 이른 엄밀한 기준을 적용하는 살마은 없겠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대부분의 믿음은 이와 비슷한 분석 논리를 통해 얻어진 것이다. 물론 반복적인 분석이 항상 옳은 결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두뇌는 복잡한 처리 과정을 거쳐 다양한 믿음을 양산해왔지만, 그 믿음이 항상 진실과 일치하는 쪽으로 진화하지는 않았다. 진실을 파악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생존이었기에 우리의 두뇌는 생존에 유리한 믿음을 낳는 쪽으로 진화했다. 자연에서 살아남는 것이 최고의 목표라면 진실과 믿음이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다. 우리 조상들이 숲속에서 바스락거리거나 윙윙거리는 소리의 근원을 일일이 추적했다면, 대부분의 '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별 의미없는 잡음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과도한 분석은 생존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신중한 평가보다 빠른 판단이 유리한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우리의 두뇌는 수만 세대를 거치면서 '정확한 이해'보다 빠르고 간단한 이해'를 선호하는 쪽으로 진화해왔다. 진실은 믿음을 주제로 한 드라마에서 당연히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생존과 번식의 드라마에서는 단역에 불과하다. 

생존과 번식을 주제로 하는 한 드라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배역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감정이다. 찰스 다윈은 1872년에 출간한 그의 저서 "인간과 동물의 감정표현"에서 "인간의 감정은 문화적 적응이 아닌 생물학적 적응과정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아이들을 자세히 관찰하고,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하고 오랜 시간동안 여러 문화권을 여행하면서 수집한 데이터를 분석하여 흥미로운 결론을 내렸다. 그중 하나는 인종에 상관없이 모든 인류가 즐거울 때 웃고 창피할 때 얼굴을 붉힌다는 것이다. 다윈의 연구를 계승한 학자들은 그 후로 150년 동안 감정과 적응의 상관관계와 감정을 유발하는 신경계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왔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가장 중요한 감정은 두려움이다. 갑자기 닥쳐온 위험을 피하려면 가능한 한 신속하게 대처해야 하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일등 공신이 바로 두려움이었다. 무력한 아이들을 돌보는 부모의 사랑도 생존과 종족 유지에 반드시 필요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외 집단에서 개인의 행동을 제어하는 당혹감, 죄책감, 창피함 등의 감정은 집단의 규모가 커진 후에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적응압이 언어와 스토리텔링, 신화, 의식, 예술, 과학뿐만 아니라 우리의 감정까지 낳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감정은 진화의 역사와 밀접하게 얽혀 있다. 그리고 믿음은 생존력을 키우는 와중에 합리적 분석과 감정적 반응이 복잡하게 섞이면서 나타난 결과이다.

또한 우리의 믿음은 정치적 힘과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원색적인 이기심에도 영향을 받는다. 어린 시절의 믿음은 부모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엄마와 아빠가 옳다고 한 것은 무조건 옳다. 리처드 도킨스의 말대로 자연선택은 자녀에게 생존에 유리한 정보를 제공하는 부모를 선호하기 때문에 부모가 자녀에게 하는 말은 진화적으로 의미가 있다. 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되면 조사, 토론, 독서, 그리고 다양한 도전을 통해 자신만의 믿음을 갖게 되지만, 이것도 기존의 사상이나 다른 사람의 믿음에 영향을 받아 종종 한쪽으로 편향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스승이나 지도자, 친구, 직장상사, 성직자 등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목록을 갖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수천 년 동안 쌓여 온 지식을 혼자 재발견하거나, 그것이 옳다고 증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에 대한 나의 믿음은 수십 년 동안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쌓인 것이다. 그동안 필자는 물리학자들이 신중하게 데이터를 수집하고, 가혹할 정도로 가정을 검증하고, 우주적 표준에 맞지 않는 것을 가차없이 폐기하는 모습을 수없이 목격해왔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우연이나 인간의 편향된 감정이 끼어드는 경우도 있다. 양자역학의 결과를 해석하는 방법 중 하나인 코펜하겐 해석은 1920년대에 물리학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몇 사람에 의해 정설로 자리잡게 되었다. 만일 양자역학을 개발한 주역이 코펜하겐 학파가 아니라 다른 인물이었다면, 물리학의 기본 형식을 그대로 유지되었겠지만 결과를 해석하는 관점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과학은 지속적인 연구와 보정작업을 거치면서 객관적 진실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 한 세대에 진리로 통하던 것이 다름 세대에 완전히 폐기될 수도 있고, 더 큰 밑그림의 일부로 판명될 수 도 있다. 이것이 바로 과학의 매력이다. 그러나 합리적 이론을 구축하여 실험을 통해 검증될 때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무질서하고, 혼란스럽고, 검정에 치우친 인산 세상에서 다양한 믿음이 혼재하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개중에는 과학을 기반을 둔 믿음도 있고, 개인이나 집단의 권위에 의존하는 믿음도 있으며, 직접 또는 간접적인 강요에 의해 유지되는 믿음도 있다. 그 외에 오래된 전통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집단도 있고, 자신의 직관을 신뢰하는 사람도 많다. 그리고 마음 속 깊은 곳에 은밀하게 숨어 있는 정보 처리 센터에서 위에 열거한 믿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하여 자신만의 믿음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게다가 우리 내면에는 서로 상충되는 믿음을 방지하거나 하고 싶은 행동을 억제하는 장치도 없다. 필자 또한 세상을 떠난 사람이나 전지전능한 신에게 일이 잘 풀리게 해달라고 기원할 때가 있다고 한다. 이것은 그의 세상에 대한 믿음에 부합하진 않지만, 소원을 빌고 나면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한다. 

전문 철학자들의 믿음은 철저하게 검증되어야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 믿을 때 이런 검증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물론 과거에 살았던 선조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이것은 적응의 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코앞에 닥친 것만 보는 사람은 바닥난 식량 재고나 은밀하게 다가오는 독거미를 간과하기 쉽다.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이 철저한 검증을 거쳐 형성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이로부터 유도된 예측은 틀리는 경우가 훨씬 많다. 파스칼 보어의 말대로 "우리는 초자연적 존재가 마음속에 거주한다고 가정하고 있지만, 결정을 내리는 괒어에서 그런 존재를 수용할 수도,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개념은 두뇌의 다양한 추론 센터를 자극하고, 이 부위는 진화를 겪으면서 인지 가능한 수준에서 자체진단을 내리도록 훈련되었기 때문에,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합리적 판단'은 개인적 사고의 한계 안에서 왜곡될 가능성이 높다.

믿음이라는 개념이 적용되는 방식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신화는 믿음을 강요하지 않으며, 이미 갖고 있는 믿음을 위협하지도 않는다. 신화의 시적이면서 은유적인 서사는 그 안에 표현된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자연 언어도 오랜 세월 동안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했을 것이다. 창의적인 표현으로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화자는 문장 곳곳에 은유를 뿌린다. 이것도 일종의 은유법인데,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뿌린다는 소금을 뿌리거나 설탕을 뿌릴 때 쓰는 말인데 은유적 표현을 소금을 뿌린다는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최초의 은유는 매우 참신한 시도여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과도한 은유는 특유의 설득력을 잃어가며 무미건조한 기법이 되었다. 

신화나 종교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처음에는 시적인 표현과 은유로 가득 찬 이야기였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은유에 담긴 의미와 시적인 감성이 거의 사라지고 문장만 남은 꼴이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이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신의 위력이 수학으로 서술되는 자연의 법칙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그 신은 우리가 얻은 관측 결과와 양립 가능하다. 그러나 단순히 양립할 수 있는 것과 추가 설명을 제공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우리가 아인슈타인의 장방정식과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 다윈과 월리스의 진화론, 왓슨과 크릭의 DNA 이중나선 등 과학적 발견에 의존하는 이유는 이들이 관측 결과와 양립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관측 결과를 예측하고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의 교리는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물론 신자들은 교리의 가치를 이런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들은 경전을 사전적으로 해석하는 관점을 고수하기 때문에 과학과 동일선상에서 평가되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사전적 의미로 해석된 교리가 이미 확립된 과학 법칙에 위배된다면, 그 교리는 거짓이다. 더 이상 긴 말이 필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전적 해석을 고집하는 것은 람타의 존재를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입에 맞는 해석이나 사전적 해석을 포기하고, 불쾌감을 주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요소를 무시하고, 모호한 내용을 시적이나 상징적인 표현, 또는 지어낸 이야기로 해석하면 경전과 람타를 포함한 교리는 완전히 논리적인 서술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이런 쪽에 끌리는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1) 종교의 초자연적 존재나 형이상학적 주장에 얽매이지 않으면 더 크고 충만한 이야기 속에서 펼쳐지는 우리의 삶을 바라보면 즐거움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고, (2) 종교적인 이야기를 인간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의 은유적 표현으로 이해하면 굳이 신자가 아니어도 경전을 읽는 데 가치를 부여할 수 있으며, (3) 특정 종교의 교리와 과학을 조화롭게 연결하는 해석 체계를 개발하는 것도 흥미로운 도전이 될 것이다. (4) 세상에 대한 신성한 느낌에 합리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경험을 확장시켜주는 또 하나의 층을 추가하는 것도 보람있는 일이고, (5) 종교 단체를 지원하고 결속력을 강화함으로써 우리도 이득을 볼 수 있으며, (6) 종교 의식에 참여하여 자신의 삶에 신성함을 더하고, 유서 깊은 전통과 나를 연결해주는 신성한 날을 되새김으로써 감정적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종교활동에 참여하면 삶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면서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경전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위에 열거한 것은 경전의 사실 여부에 상관없이 그 가치를 인정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100여년 전 미국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적 경험에 대한 진솔하고 날카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그의 관점은 의식과 물리학에 대한 달라이 라마의 관점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 작업을 수행하는 주체는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자연에 접근하고 있지만, 이 작업을 수행하는 주체는 개인의 내면 세계임으로 강조했다. 데카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제임스도 내면의 경험이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유일한 경험이라 믿었다. 과학은 객관적인 현실을 추구하지만, 우리는 오직 마음이라는 주관적인 과정을 통해 현실을 인식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말하는 객관적인 현실이란 주관적인 마음의 산물인 셈이다. 그러므로 종교적 수련을 주관적 경험에 기초하여 내면 세계로 떠나는 여행이라고 생각하면 교리과 객관적 현실이 일치하는지의 여부는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제임스가 말한 아름다움과 두려움, 약속과 목소리, 그리고 온화함과 웅장함에서 선과 악, 경이로움과 불아한, 외경심과 감사하는 마음에 이르는 모든 것이 내면 세계에서 탐험을 기다리고 있다. 자연에 존재하는 입자를 아무리 열심히 관찰하고 자연의 수학 법칙을 아무리 쫓아도 이런 개념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여기 도달하려면 특정 입자들이 특정한 배열로 모여서 생각하고, 느끼고 추론하는 능력을 획득해야 한다. 융통성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물리 법칙의 통제 하에서 이런 입자 배열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랍고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의 종교는 역사가 오래되었다. 지난 수천 년, 또는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수행을 실천하면서 의식을 치르고, 이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립하고, 도덕심을 키우고, 예술적 영감을 떠올리며 죽음을 초월한 이야기의 일부가 되고, 죽음이 끝이 아님을 되새기고 가혹한 징벌을 두려워하고,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죄인을 가두거나 죽이는 행위를 정당화했다. 개중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소름끼치는 것도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이 종교적 전통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종교는 물질계의 과학적 특성을 증명하는 데 별다른 실마리를 제공하지 않지만 일부 독실한 신자들은 종교를 통해서 삶의 일관성을 간파하고, 거대한 이야기 안에서 친근함과 진귀함, 기쁨과 고통을 느꼈다. 이런 전통이 있기에 세계적으로 널리 퍼진 종교는 신도들에게 시대를 초월한 동질감을 안겨 줄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유태인 가정에 태어나 유태인을 자라났고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했다. 히브리 학교를 다녔고 히브리어를 배웠다. 성인이 된 후에는 공식 행사에 참여하는 빈도수가 줄어들면서 교회와 멀어졌다. 그 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유대교 사제들이 한동안 매일같이 그의 집에와서 카디쉬를 읊었는데 깊은 상심에 빠진 그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그다지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었으나 세상을 떠난 후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유대교 전통에 흡수된 것이다. 그는 그들이 읊는 내용을 알아듣지도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으나 그의 믿음이 잠시마나 유대교의 전통과 연결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위대한 유산이다. 그리고 그는 그 의식을 통해 종교의 장엄함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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