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그린이 말하는 세상의 시작과 진화 그리고 끝
5. 입자와 의식 : 생명에서 마음으로
40억년 전 최초의 원핵 세포가 등장한 후, 그리고 900억 개의 뉴런 네트워크와 100조개의 시냅스로 이뤄진 인간의 두뇌가 등장하기 전의 어느 시점에 생명체는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동경하고 희생하고 상상하고 창조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모든 것은 의식에서 시작되었고, 모든 가치는 의식을 거처 탄생한다고 했다. 그러나 얼마전까지 의식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었다. 자신의 목소리는 오직 자신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이 오랜 세월동안 의식을 배척해온 이유는 물리법칙을 벗어난 영역을 언급하면 과학자들은 얼굴을 찌푸리며 자리를 박차고 연구실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17세기 뉴턴은 인간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자연에서 명확한 패턴을 발견하여 운동 법칙으로 요약해 놓았고, 그로부터 수백 년 후에 태어난 과학자들은 뉴턴의 물리학으로 설명할 없는 세 가지 영역을 새로 개척했다. 첫째, 뉴턴이 고려했던 움직이는 사물의 사이즈보다 훨씬 작은 영역에 대해서 탐구할 때는 양자물리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양자물리학은 기본 입자의 거동과 생명의 저변에 깔려있는 생화학적 과정을 설명해준다. 둘째, 뉴턴이 고려했던 것보다 훨씬 큰 영역을 탐구할 때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을 도입해야 한다. 일반상대성 이론은 중력의 근본적인 성질을 비롯하여 생명체의 출현에 반드시 필요한 별과 행성의 형성 과정을 설명해준다. 그리고 세번째는 가장 난해한 영역으로 뉴턴이 고려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대상을 이해하려면 여러 개의 입자들이 한데 모여서 생명과 마음을 창출하게 된 과정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행성을 고체구로 간주하여 운동방정식을 풀면 공전 궤도를 쉽고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지만 사람의 머리를 고체구로 간주해서 마음의 작동 원리를 알아낼 수는 없다. 그러나 투박한 근사법을 버리고 두뇌를 구성하는 모든 입자의 움직임을 일일이 추적하려면 현대의 복잡한 수학과 컴퓨터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환상적인 기술이 필요하다.
과학자들은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장치를 통해서 뉴런의 활동을 지원하는 혈류의 흐름을 추적하거나, 두뇌 깊은 곳에 탐침을 삽입하여 뉴런이 활성화되는 순간 그곳에 흐르는 전류를 측정하거나, 뇌파도를 이용하여 두뇌를 가로지르는 전자기파를 측정하여, 겉으로 드러난 행동과 내면의 경험 사이의 관계를 부분적으로 규명하는데 성공했다. 의식을 물리현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조금씩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엔트로피나 진화, 그리고 생명은 바깥에서 연구될 수 있다. 즉, 연구자와 연구대상이 별개로 존재하기 때문에 3인칭 시점에서 서술이 가능하다. 우리는 이야기의 증인이며, 시간과 정성을 충분히 들이면 완벽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의 주제가 의식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시각, 청각, 기쁨과 슬픔, 안락함과 고통, 속 편함과 근심 등 내면의 감각에 관한 이야기는 1인칭 시점에서 서술되어야 한다. 나는 주관적 세계를 경험할 뿐만 아니라, 그 세계에서 나의 행동을 스스로 통제한다는 확실한 느낌을 갖고 있다. 물리 법칙 같은 것은 통하지 않는다. 의식 수준에서 우주를 이해하려면 완전히 개인적이면서 자율적이며 주관적인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의식의 본질을 생각하다 보면 완전히 다른 것 같으면서도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두 가지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1) 물질은 의식을 창출할 수 있는가? (2) 자율적인 의식은 두뇌와 몸을 구성하는 물질에 물리 법칙이 적용된 결과에 불과한가? 물질과 마음이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굳게 믿었던 데카르트는 두 질문에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우주에는 물질이 있고, 마음을 가진 생명체도 존재한다. 물질은 마음에 영향을 주고, 마음은 물질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이들은 분명히 다른 존재다. 데카르트의 관점은 확실히 설득력이 있다. 테이블과 의자, 개와 고양이, 풀과 나무는 내 머릿속과 같지 않다. 그런데 바깥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과 이들을 지배하는 물리법칙이 나의 의식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저 단순히 이야기의 수준을 높이거나 시선을 바깥에서 안으로 돌리는 것만으로는 의식을 이해할 수 없다. 의식에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선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 못지않은 혁명적 발상이 필요하다. 요즘 의식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런 길을 가고 있다.
두뇌의 모든 기능이 경이로운 의식을 낳는 것은 아니다. 신경 활동의 상당 부분은 의식의 저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석양을 바라볼 때 우리의 뇌는 매순간 망막의 광수용체에 도달하는 수조 개의 광자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여 맹점 때문에 완성되지 못한 영상을 보완하고 눈동자와 머리 방향이 바뀔 때 마다 영상을 수정하고 뒤집힌 상을 바로 세우고, 두 눈에 동시에 들어온 영상을 하나로 합치는 등 엄청난게 많은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석양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진 당신은 눈 뒤에서 일어나는 복잡다단한 사건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두뇌는 시각을 통해서 쏟아져 들어오는 단어와 문장들을 분석하느라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이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느긋하게 독서를 즐길 수 있다. 대화와 보행, 심장박동, 혈액순환, 소화, 근육의 움직임 등도 따로 신경쓰지 않아도 자동으로 진행된다. 두뇌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난 일을 한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어 왔다. 3천년 전에 집필된 인도의 고대 경전 베다에는 무의식의 개념이 언급되어 있는데, 그 후로 힌두교의 사두들은 의식으로 감지되지 않는 정신 세계를 느끼기 위해 다양한 수행법을 개발해왔다. 서양에서는 성 오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 윌리엄 셰익스피어, 그리고 라이프니츠도 상징적인 언어로 무의식을 언급했다. 흥미로운 것은 의식의 감지 범위를 벗어난 것 같으면서도, 무의식의 메아리가 의식에 감지된다는 것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의식이 풀지 못한 문제를 무의식이 해결한 사례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1936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독일의 약리학자 오토 뢰비도 그런 일을 겪었다. 그는 1921년 부활절 전날 밤에 문득 잠에서 깨어나, 방금 전 꿈에서 보았던 아이디어를 황급히 메모지에 적어 놓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메모지를 다시 읽어보았는데,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언가 중요한 실마리를 남겨놓은 심증이 있었지만, 잠결에 암호처럼 휘갈긴 글이라 갈피를 못잡은 것이다. 그런데 다음 날에도 같은 꿈을 꾸다가 깨어난 그는 곧바로 실험실로 달려가 꿈에서 보았던 대로 실험을 수행했다. 그것은 세포들 사이의 정보 교환이 전기 신호가 아닌 화학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오래된 가설을 확인하는 실험이었다. 뢰비의 실험은 월요일에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고 이 연구 덕에 훗날 노벨상을 받았다. 일반 대중들은 마음의 은밀한 작용을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이론과 결부 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는 억제된 기억과 욕망, 반목, 혐오, 공포, 편견 등이 마음의 저변에 남아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다. 현대에 와서 달라진 점은 구체적인 데이터를 통해 마음의 작동 원리를 추측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과학자들은 마음을 부분적으로나마 들여다보고, 의식의 원천인 두뇌 활동을 추적하는 기발한 방법을 개발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신경 기능의 일부를 상실한 환자를 대상으로 실행된 실험이다. 1980년대 말에 피터 헬리건과 존 마셜은 P.S.라는 약칭으로 알려진 여성 환자의 연구사례를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오른쪽 뇌에 손상을 입은 그녀는 비슷한 사례의 환자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왼쪽 먼 거리에 제시된 그림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평범한 집을 그린 그림을 오른쪽 눈에 보여주고, 이와 동시에 똑같은 집이 불타는 그림을 왼쪽 눈에 보여 줘도 두 그림의 차이를 알아채지 못할 정도 였다. 그러나 둘 중 어떤 집이 좋냐고 물으면 그녀는 예외없이 불타지 않은 집을 선택했다. 그래서 핼리건과 마셜은 피험자(P.S.)는 불꽃을 인식하지 못했지만, 이 정보가 은연중에 두뇌에 입력되어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결론지었다. 건강한 두뇌도 숨은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 심리학자들이 수행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피험자가 어떤 영상을 집중적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다른 영상을 40밀리초 미만의 짧은 시간 동안 보여주면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잠재의식 영상은 의식이 내리는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 1950년대 말에 코카콜라사의 시장조사 연구팀이 영화필름 사이에 광고화면을 끼워 넣어 매출이 폭발적으로 늘었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요즘은 두뇌 활동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다양한 연구 장비가 개발되어, 마음속에서 은밀히 진행되는 과정을 그림과 수치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두뇌는 신경 섬유를 통해 접수된 신호를 빠르게 송수신하고 생물학적 과정을 제어함으로써 적절한 반응을 유도할 수 있다. 단, 이런 놀라운 기능의 저변에 깔려있는 신경 경로와 생리학적 세부 사항을 파악하려면 복잡하기 그지없는 생물학적 회로를 전례없는 정확도로 그려내야 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동안 발표된 중간 결과를 보면 우리에게 친숙한 과학적 접근법이 여전히 통하는 것 같다.
이것이 전부라면 딱히 문제될 것이 없다. 시간에 충분히 투자만 하면 된다. 그러나 마음이 하는 일을 넘어서 마음이 느끼는 감각을 들여다보면 전통적인 과학으로 과연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과학자들이 말하는 어려운 문제이다. 1671년의 어느날 뉴턴은 현대과학이 태동하던 그 시기에 가장 많은 과학 기사를 썼던 헨리 올덴버그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빛의 절대적 특성을 정의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빛이 우리의 마음 속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색이라는 환영을 만들어 내는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확실한 것과 추론을 섞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시 뉴턴은 색에 대한 내면의 느낌이라는 가장 흔한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색에 대한 느낌은 노란색이나 푸른색, 또는 초록색의 정신적 환상을 훨씬 넘어선 문제다. 우리의 마음이 의식의 일부로 느껴지는 다양한 내적 감각(생각, 감정, 기억, 표상, 욕망, 소리)을 관장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두뇌는 어떤 과정을 거쳐 변화무쌍한 주관적 경험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유지하는 것일까? 그리고 두뇌 속에서 진행되는 입자의 운동이 어떻게 감정과 느낌을 낳는다는 말인가? 우리는 입자들이 우리의 내면에 행복이나 슬픔을 유발하는 과정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우리는 기쁨과 슬픔, 사랑과 증오, 만족감과 상실감을 수시로 느끼며 살고 있지만, 입자의 상호 작용으로부터 이런 감정이 생성되는 과정은 전혀 모르고 있다. 태풍이나 화산 활동도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문제가 어려운 이유는 내면 세계에 대한 무지 때문이 아니라, 계에 포함된 입자의 수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기술적인 문제만 해결되면 태풍이나 화산 활동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한 태풍과 화산에는 주관적 내면 세계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1인칭 시점에서 서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의식을 가진 존재는 3인칭의 객관적 서술만으로는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필자는 물리학의 신봉자로 살아왔다가 의식 문제를 신중하게 생각하다 물리학에 대한 의심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미국의 철학자 프랭크 잭슨이 제기한 논리인데, 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메리라는 소녀에 대한 이야기다. 색맹인 소녀는 커서 천재적인 의학자가 되어 자신의 유전병을 고치게 되는데 이후 색이 입혀진 세상을 처음 본 메리는 그로부터 뭘 배울 수 있을 것인가? 두뇌에서 진행되는 모든 과정을 알고 있는 그녀가 내면에서 색을 느끼는 것만으로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을까? 빨간 장미를 마주친 메리는 색으로부터 생성되는 내면의 감성에 눈을 뜨고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색감을 강렬하게 느낄 것이다. 잭슨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메리는 두뇌의 물리적 작용에 관한 한 모르는 것이 없었지만, 단 한 번의 경험으로 지식의 폭이 확장되었다. 빨간색에 대한 두뇌 반응을 통해 의식적 경험이라는 지식을 획득한 것이다. 결국 두뇌의 물리적 작용을 완벽하게 이해해도 무언가 중요한 요소가 누락되어 있다라는 것이 이 이야기의 결론이다.
그런데, 한편 미국의 철학자 대니얼 데닛은 두뇌의 물리적 기능을 완벽하게 이해한 상태가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단 한번도 완벽한 물리적 이해의 경지에 도달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이 어느 정도의 이해력을 갖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두뇌의 물리적 기능을 모두 알고 있으면 의식 현상까지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데닛은 메리가 빛의 물리학에서 눈의 생화학적 작동 원리와 두뇌의 신경과학적 구조에 이르기까지 모두 알고 있다면 빨간색을 본 적이 없어도 색으로부터 창출되는 내면의 감각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붕대를 푼 메리의 눈에 빨간 장미가 들어오면 아름다운 자태에 어떤 반응을 보일 수도 있짐나, 빨간색에 대한 느낌은 그 전에 예상했던 바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루이스와 로렌스 네미로는 메리는 새로운 능력(빨간색을 구분하고 기억하고 상상하는 능력)을 획득했지만 이런 것은 전에 몰랐던 새로운 사실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붕대를 풀었을 때 우와 라는 감탄사를 내뱉을 수는 있지만, 이것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떠올리는 새로운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지 새로운 지식에 눈을 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메리 이야기를 창안한 잭슨도 이 문제를 여러해 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처음의 주장을 철회했다. 우리는 직접적인 경험을 통한 학습에 지나칠 정도로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색과 관련된 지식을 얻는 방법이 직접 경험하는 것 뿐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잭슨의 주장에 따르면 이는 검증되지 않은 믿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의 완벽한 지식은 빨간색을 보았을 때의 느낌을 알아내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누구의 주장이 옳을까?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의식이 물질에 작용하는 물리적 힘을 통해 서술되는 것이라면 그 중간 과정만 알아내면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현대과학의 범주 바깥에 있는 낯선 개념을 도입하여 기초부터 꿰어 맞춰야 하기 때문에 할 일이 엄청나게 많아진다. 안타깝게도 메리의 이야기에 관한 한 확실히 결론을 내릴 만한 실험 결과는 단 한 건도 보고된 적이 없으며, 내면 세계의 원천을 설명하는 정확한 이론도 없다.
의식의 원천에 대한 설명은 매우 다양한 버전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 중 한 쪽 극단에는 의식을 환상이라고 취급하는 제거론이 있고, 반대쪽 끝에는 의식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주장하는 관념론이 있으며 둘 사이에 수많은 가설이 난립한 상태다. 개중에는 전통적인 과학적 사고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은 것도 있고, 현대과학의 약점을 교묘하게 파고든 것도 있으며, 현실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정의를 여전히 고수하는 주장도 있다. 이 모든 주장을 아우르는 두 가지 짧은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18~19세기에 생물학계의 가장 큰 화젯거리는 단연 생기론이었다. 이것은 생명과 관련하여 앞서 언급된 어려운 문제와 일맥상통한 개념으로 "모든 생명 현상은 물질과학을 넘어선 어떤 원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고 주장하는 사조다. 이 세상은 생명이 없는 기본 단위(입자)로 이뤄져 있는데, 이들이 모여서 무슨 수로 생명체를 형성한다는 말인가? 생기론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입자의 집합만으로는 생명체가 될 수 없으며, 무생물이 모여서 생명 활동을 하려면 비물리적인 생기나 생명력이 추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세기에 마이클 패러데이를 비롯한 일단의 물리학자들은 전기와 자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이 현상은 마술처럼 보였지만 물리학자들은 뉴턴이 구축한 표준역학의 범주 안에서 이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통과학에 기초한 논리는 맞을 가증성이 높으므로, 이것을 전기와 자기의 쉬운 문제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위에 언급된 두 가지 이야기는 결국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다. 생명과 관련된 문제는 향후 200년 동안 다양한 연구와 실험을 통해서 마술 같은 요소에 의존하던 가설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지금도 생명의 기원은 미지로 남아있지만 굳이 생기나 생명력 같은 모호한 개념을 도입하지 않아도 입자의 계층 구조(원자, 분자, 세포 기관, 세포, 조직)만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즉, 생명 현상은 기존의 물리학, 화학 그리고 생물학으로 이해 가능하다는 뜻이다. 생명의 어려운 문제가 쉬운 문제로 재분류 된 것이다.
전기와 자기를 연구하던 학자들은 정교한 실험에서 얻은 데이터를 분석하다가 1800년대 이전의 교과서에 수록되지 않은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전기와 자기 현상의 원천인 새로운 물질(전기전하)이 새로운 유형의 작용(전기장, 자기장)에 반응하고, 이들이 변하는 양상은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유도한 새로운 방정식으로 서술된다. 문제가 풀리긴 했는데, 쉬워 보였던 문제가 어려운 문제로 판명된 것이다.
물리학을 신봉하는 다수의 과학자들은 생기론이 결국 의식으로 귀결된다고 믿고 있다. 두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의식의 어려운 문제는 서서히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두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의식의 어려운 문제는 서서히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내면의 경험이 신비하게 보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생리적 두뇌 활동의 직접적인 결과로 보는 관점이 우세해 질 것이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마음과 관련된 새로운 요소가 아니라, 두뇌의 명령 체계다.
물론 전자기학과 관련된 이야기를 의식 이론의 바람직한 모형으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다. 만일 당신이 물리적 세계를 과학적 논리로 하나씩 풀어 나가다가 어려운 문제에 직면한다면, 어떻게든 기존의 과학적 틀 안에서 해결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개중에는 기존의 틀에 부합되지 않는 것들도 있고, 현실의 새로운 특성을 드러내는 문제도 있다. 전자기학의 의식 이론의 모형으로 간주하는 학자들은 의식이 바로 이런 종류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관점이 옳다면 지식의 장을 완전히 재구성하고 더욱 작은 단위로 세분해야 주관적 경험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주장을 펼친 주인공은 첼머스와 어려운 문제, 그 자체였다.
챌머스는 마음이 없는 입자에서는 의식이 생겨날 수 없다는 믿음 하에 전자기학의 탄생 배경을 마음 속에 새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19세기 물리학자들이 전통적인 과학을 사용하여 전자기적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과감하게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던 것처럼,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려면 물리학의 한계를 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방법 중 한가지는 개개의 입자들이 더 이상 근본적 설명이 불가능한 의식의 씨앗을 갖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에 대한 서술은 자연의 기본 단위에 스며 있으면서 더 이상 축약될 수 없는 주관적이고 고유한 특성을 포함하는 쪽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우리가 지난 세월 동안 물리적 관점에서 의식을 설명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 요소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없는 입자들이 무슨 수로 마음을 창조한다는 말인가?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도 도저히 불가능하다. 의식적인 마음이 창조되려면 의식을 가진 입자가 있어야 한다. 원시의식을 가진 입자들이 여러 개 모이면 우리에게 친숙한 의식을 발휘할 수 있다. 이 가설에 의하면 모든 입자들은 이미 알려진 물리적 특성(질량, 전기전하, 핵전하, 양자적 스핀 등) 외에 지금까지 무시되어 왔던 원시의식을 갖고 있다. 마치 고대 그리스시대에 유행했던 범신론을 연상시킨다. 챌머스는 야구방망이건 박죄의 뇌이건 간에 입자로 이루어진 모든 만물에 의식이 깃들어 있다는 흥미로운 가설을 제안하며 학계에 관심을 끌었다. 이쯤에서 모두들 궁금해하는 내용이 생긴다. 원시의식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입자에 스며들게 되었는가? 애석하게도 답을 아는 사람은 없다. 제안자인 챌머스 조차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따지면 다른 물리량도 마찬가지다. 입자들이 어떻게 질량이나 전기전하를 갖게 되었는지 질문해도 답을 알기 어렵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곤 질량이 중력을 창출하고 거기에 반응한다는 것, 그리고 전기하가 전자기장을 창출하고 거기에 반응한다는 것뿐이다. 중력과 전자기력의 경우, 본질적인 정의를 작용과 반응로 대치하는 것이 교묘한 꼼수로 보일 수 있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두 힘의 수학 이론으로부터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정확한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원시의식도 정교한 수학 이론이 개발되면 정확한 예측이 가능할 것이다.
매우 낯선 가설임에도 불구하고, 챌머스는 자신의 접근법이 과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객관적 현실을 규명하는 데 주력하면서 실험 데이터를 설명하는 다양한 방정식을 개발해왔다. 그러나 이 데이터는 오직 3인칭 시점에섬나 의미를 갖는다. 챌머스는 내면 세계에도 이런 데이터가 존재하며, 이 영역의 패턴과 규칙성이 반영된 방정식도 존재할 것이라고 했다. 기존의 과학은 외부 데이터만 설명했지만, 차세대 과학은 내면 세계의 데이터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설은 물리학의 모든 것을 정보로 간주하는 정보물리학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정보물리학의 창시자는 블랙홀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던 존 휠러로 알려져 있으며 그 후로 일단의 추종자들에 의해 꾸준히 연구되어 왔다. 지금 이 세계의 상태를 서술한다는 것은 모든 입자의 배열 및 운동과 공간에 퍼져 있는 장에 대한 정보를 명시한다는 뜻이다. 물리 법칙에 이 정보를 대입하면 해당 물리계의 미래에 대한 정보가 출력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물리학은 일종의 정보 처리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보 물리학의 관점으로 볼 때, 챌머스의 가설은 정보를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3인칭 관점에서 바라보는 객관적 정보(지난 수백 년간 물리학이 수집한 정보)와 1인칭 관점에서 바라본 주관적 정보(처음 물리학이 관심을 갖게된 정보)가 바로 그것이다. 완벽한 물리학이론으로 구축하려면 외부로 드러난 정보 뿐만 아니라 내면 세계의 정보까지 고려해야 하며, 각 정보의 역학적 변화를 서술하는 방정식도 개발되어야 한다. 내면 세계의 정보 처리 과정은 의식의 물리적 기반을 제공할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입자와 힘을 하나의 수학 체계로 통일하는 이론을 연구하면서 말년의 대부분을 보냈다. 이것을 만물의 이론이라 부른다. 필자의 전공 분야인 끈이론도 만물의 이론의 후보 중에 하나다. 만물의 이론이라면 당연히 의식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입자물리학을 구축하는 것과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규모와 복잡성이 크게 다른 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것은 과학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에 속한다. 챌머스가 옳다면 가장 기본적인 단계(기본 방정식과 기본 구성 요소)에서 과학의 범주 안에 포함될 것이며, 언젠가는 외부 정보 처리 과정(객관적인 물리적 과정)과 내부 정보 처리 과정(주관적인 인식 경험)을 하나로 묶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만물의 이론이다. 의식에 대한 이해 수준은 혁명적으로 향상될 것이다. 주관적 경험이 생성되는데 필요한 물리적 조건을 알아낸다면 커다른 도움이 될 것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고려하고 있는 의식 이론의 핵심 주제다.
인간의 두뇌는 주름지고 축축한 물질로 된 정보 처리 기관이다. 과학자들은 두뇌를 스캔하거나 내부에 탐침을 삽입하는 등 적극적인 방법으로 뇌구조를 분석한 끝에 각 부위마다 각기 다른 정보(시각,청각,후각,언어처리)를 처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렇다면 수많은 정보처리 장치중에서 의식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탈리아의 정신과 의사이자 신경과학자인 줄리오 토노니는 미국의 신경과학자 크리스토프 코흐와 함께 이 질문을 파고들다가 통합정보이론이라는 접근법을 개발했다.
누군가 나에게 빨간색 페라리를 선물했다고 하면 차를 보는 순간 수많은 감각 데이터가 나의 뇌를 자극할 것이다. 다양한 정보들이 섞여서 하나로 통합된 인지 경험을 창출한다. 토노니는 이것을 고도로 통합된 정보라고 했다. 외형 정보와 색상 정보는 시각피질의 각기 다른 부분을 자극하지만, 내 의식은 페라리의 외형과 색상을 하나로 묶어서 인식한다. 토노니는 이것이 의식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했다. 즉, 의식(마음)으로 전달되는 정보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의식의 두번째 특징은 용량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다. 어지러운 느낌에서 자극적인 상상, 추상적인 계획과 사고, 온갖 걱정과 미래의 예측에 이르기 까지, 마음에 담을 수 있는 대상의 목록은 거의 무한대에 가깝다. 내가 빨간색 페라리를 바라볼 때, 내 마음은 무수히 많은 목록 중 특정 대상에 완전히 집중된 상태다. 토노니는 이 사실에 착안하여 의식을 고도로 통합되고 차별화된 정보로 정의했다.
디지털 카메라가 빨간색 페라리를 저장하는 경우와 비교를 해보면, 이미지 파일의 숫자 배열에 각 픽셀의 색상 정보와 밝기 정보가 자장된다고 하자. 이 숫자는 Photo diode에 도달하면서 생긴 것이다. 디지털 파일에 담긴 정보는 픽셀 단위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컴퓨터 저장 용량이 충분하여 개개의 픽셀에 담긴 정보를 각각 파일에 하나씩 저장한다 해도 전체적인 정보는 손실되지 않는다. 즉, 디지털 파일에는 정보가 통합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카메라의 정보는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정보의 세분화라는 과목에서 그다지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한다. 우리의 두뇌가 정신적 표현을 만들어 낼 때는 정보는 고도로 통합되고 세분되지만, 디지털 사진에 담긴 정보는 이런 호사를 누리지 못한다. 토노니는 이것이 페라리를 바라보는 우리와 페라리를 이미지 사진에 담는 디지털 카메라의 차이라고 했다. 토노니는 이 차이를 수치로 나타내기 위해 파이라는 양을 정의했다. 정보가 더욱 잘게 세분되고 통합성이 높을수록 파이 값이 커지는 식이다. 따라서 통합성이 떨어지고 세분화가 덜된 초보적 의식은 파이가 작고, 인간과 같이 고도의 통합성과 세분화가 이뤄진 복잡한 의식은 파이가 크다. 물론 파이값이 우리보다 큰 계(초고도 의식)도 존재할 수 있다. 챌머스의 가설과 마찬가지로 토노니의 가설도 범신론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론의 어디에도 특정 물리계와 관련된 구석은 없다. 우리의 의식은 생물학적 두뇌 안에 들어 있지만 토노니의 가설과 그가 구축한 수학 체계에 의함녀 두뇌의 시냅스 이건 중성자별의 내부이건 간에 파이값이 충분히 크면 의식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텍사스대학교의 컴퓨터공학자 스콘 에런슨은 이 가설이 기계의 역공을 낳는다고 주장했다. 일련의 수학 계산을 수행하다가 여러 개의 단순한 논리게이트를 교묘하게 연결하면 전체 네트워크의 파이가 사람과 비슷하거나 높아질 수도 있다는 놀라운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그렇다면 스위치로 연결된 네트워크가 의식을 갖고 있다는 말인가? 에런슨은 기계가 의식을 가질 수 없으므로 토노니의 가설은 틀렸다고 주장했고 토노니는 이에 아무리 이상한 결론이 내려져도 상관없다며 네트워크는 의식을 가질 수 있다고 여유있게 받아넘겼다. 기계이기 때문에 의식을 가질 수 없다는 생각은 근거없는 우월감일지 모르며 인간의 두뇌야 말로 1.4kg에 불과한 혈관과 신경으로 이뤄진 물체인데 의식을 창조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신기할 따름이다. 토노니의 접근법이 옳은 것으로 판명된다면 임의의 계 의식을 갖기 위해 어떤 조건을 만족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통합 정보 이론은 의식이 지금과 같은 느낌으로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고도로 통합되고 세분화된 정보는 어떻게 내적 인식을 만들어내는가? 토노니는 그냥 그렇게 된다고 했다. 우리가 할 일은 물리계가 의식을 갖는데 필요한 조건을 알아내는 것이며 이것이 통합 정보 이론의 목적이다. 필자는 토노니의 관점은 존중하지만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오랜 세월 동안 교육 받고 연구해온 학자 입장에서는 입자의 거동을 서술하는 물리 법칙과 마음 사이에 구체적인 연결 고리가 밝혀지기 전에는 만족하기 어렵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이론은 물리학에 기반을 두 가설로서, 의식의 미스터리에 접근하는 가장 분명한 방법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경과학자 마이클 그러지아노가 제안한 인식 이론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두뇌 기능에서 출발한다. 다시 선물받은 빨간색 페라리로 돌아가보자. 우리의 시선이 페라리에 꽂히는 순간부터 인지 데이터 처리 과정이 가동되기 시작한다. 빨가색 외관과 냄새, 매끈하게 마무리된 금속의 질감, 유리, 바퀴, 엔진, 파워, 속도 등 다양한 물리적 특성과 성능이 우리의 머릿속에 생성되어 이미 갖고 있던 자동차의 이미지와 결합되고, 약간의 비교 과정을 거친 후 역시 페라리야 라는 감탄사를 유발한다. 여기까지는 통합 정보 이론과 동일하다. 그러나 그라지아노는 이 결과를 살짝 다른 방향으로 몰고 갔다. 그가 제안한 이론의 핵심은 우리가 세부사항에 아무리 신경을 쓴다해도 정신적 표현은 항상 단순화된다는 것이다. 사실 자동차가 빨갛다는 것은 빨간 계열의 수많은 색상을 하나로 뭉뚱그린 표현이다. 수많은 색감을 모두 정보화했다면 우리는 정신 집중을 하지 못할 것이며 이는 효율적이지 못하다. 그런 생명체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데이터 분석에 집중하다가 포식자를 피하지 못하고 멸종했을 것이다.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은 종은 생존에 별 도움되지 않는 정보를 몇 개의 범주로 과감하게 통폐합시킨 종이었다. 우리는 자동차나 눈사태, 지진이 아닌 동물이나 사람을 대할 때도 위와 같은 단순화 과정을 거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물리적 외형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까지 단순화 시킨다. 다른 생명체와 마주쳤을 때에는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빨리 간파해야 한다. 친구인지, 적인지 공생을 원하는지 자기 이익만 챙기는지를 알아채야 생존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획득한 이 능력을 마음의 이론이라 부르기도 하고, 지향적 입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라지아노는 우리가 이 능력을 수시로 자신에게 발휘한독 강조했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간편한 도식을 매 순간 창출해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과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우리가 임의의 대상을 마음속에 떠올릴 때 대부분의 세부사항은 생략된다. 뉴런이 활성화되는 과정과 정보처리 과정, 그리고 복잡한 신호교환은 모두 무시되고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만 부각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인식(awareness)이라고 부른다. 그라지아노는 우리의 의식이 마음속에서 표류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했다. 단순화된 도식을 선호하는 뇌의 성향이 무언가에 집중하는 자신에게도 적용되어, 집중을 유발한 물리적 과정이 무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과 감각은 출처가 불분명하고 그저 머릿속을 떠다니는 것처럼 느껴진다. 세포와 입자가 수행하는 물리적 과정이 의식과 다르게 느껴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어려운 문제가 어려운 이유(의식이 육체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도식화된 정신 모형이 생각과 감각을 육체와 연결하는 두뇌기능이 부각되지 않도록 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라지아노의 이론처럼 물리학에 기초한 가설의 매력은 의식을 생명이 없고, 생각도 없고 감정도 없는 구성 성분으로 축약할 수 있다는 점이다.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의식을 완벽하게 설명하려면 신경학이라는 방대한 영토를 정복해야 한다. 그러나 낯선 영역에서 온갖 덤불을 헤치며 힘들게 나아가야 하는 첼머스의 가설과 달리, 물리학에 기반을 둔 그라지아노의 접근법을 수용하면 전통적인 과학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않아도 된다. 문제는 이질적인 영역을 애써 탐험한 것이 아니라, 두뇌 지도를 전례없이 세밀하게 작성하는 것이다. 평범한 법칙에 따라 평범한 과정을 수행하는 평범한 물질들이 사고와 느낌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창출하는 것이다. 일부 학자는 고귀한 인간의 의식을 물리학의 범주에서 서술하는 것이 인간의 고귀한 특성을 깎아내리는 불경스런 행위며 물질주의에 사로잡힌 과학자들의 서투른 발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라지아노의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물리학으로 의식을 서술하는 것이 의식의 가치를 훼손한다는 주장에 당당하게 맞설 줄도 알아야 한다.
지난 수십 년동안 수많은 과학자들이 의식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로 양자역학을 꼽았다. 두뇌를 포함한 모든 물질의 구성 입자들은 양자역학의 법칙을 따르고 있다. 양자역학은 마음을 비롯한 모든 만물에 물리적 기초를 제공한다. 그러나 양자역학과 의식을 한 그릇에 담으려면 더 깊은 연결고리가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이런 주장이 대두된 이유는 양자역학의 논리가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오랜 세월동안 지켜온 믿음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내막은 다음과 같다. 양자역학은 물리학이라는 학문이 탄생한 후 지금까지 제안된 이론들 중 가장 정확한 이론이다. 이론과 실험의 결과가 다른 사례는 단 한번도 없었으며 그 차이는 10억분의 1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핵심에는 지독한 수수께끼가 남아 있다. 양자역학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예측이 확률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에서 전자가 이곳에 있을 확률이 50%이고, 저곳에 있을 확률이 50%라는 것은 전자는 이곳 아니면 저곳 둘중에 하나의 위치를 이미 점유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양자역학에 의하면 전자는 이곳에서 존재하는 상태와 저곳에서 존재하는 상태가 모호하게 섞인 이상한 상태에 놓여있다. 전자가 발견된 확률이 0이 아닌 곳이 여러 개 존재한다면, 전자는 그 모든 위치에 동시에 존재한다.이것은 너무나도 이상한 상황이어서 고전 물리적 관념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양자역학을 당장 폐기처분하고 싶을 것이다. 지난 한 세기동안 과학자들은 직관과 완전히 반대로 돌아가는 양자역학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애초의 예상과 달리, 깊이 파고들수록 문제는 더욱 이상하게 변해갔다. 양자역학에 의하면 전자가 발견될 확률은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지만, 일단 관측이 실행되면 무조건 한 장소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방정식으로는 확률이 한 장소에 갑자기 집중되는 이유를 알 길이 없다. 즉, 전자가 이곳과 저곳에 동시에 존재한다면 관측 장비는 두 곳에서 동시에 전자를 발견해야 하고, 장치의 눈금을 읽은 우리의 두뇌는 전자가 이곳과 저곳에 동시에 존재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관측이 실행되면 우리의 의식은 여러 개의 결과를 혼합적으로 인지한 상태가 아니라 단 하나의 결과만을 인지한 상태로 축약된다. 양자역학의 방정식을 아무리 분석해봐도 붕괴를 유발하는 과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양한 결과들이 모호하게 섞여 있는 양자적 현실과 하나의 뚜렷한 하나의 결과만 존재하는 실제 현실을 어떻게 매끄럽게 연결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관측문제다. 1930년대 물리학자 프리츠 런던과 에드몬드 바우어 그리고, 수십 년 후에 노벨상을 수상한 유진 위그너는 의식을 이용하여 관측 문제를 해결할 것을 제안했다. 관측 문제가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인지한 현실과 양자역학의 수학 체계에서 예측된 결과가 일치하지 않을 때뿐이므로, 해결의 열쇠가 의식에 있다라는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다. 양자역학의 법칙이 관측대상인 전자를 포함하여 관측 장비 및 결과 출력용 부품을 구성하는 모든 입자에 똑같이 적용된다고 상상해보자. 그렇다면 관측 결과가 출력 장치에 표시될 때까지, 전자는 이곳과 저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모호한 상태에 놓여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출력 장치의 눈금을 읽는 순간, 감각 데이터가 두뇌 안으로 유입되면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서부터는 표준 양자역학의 법칙이 더이상 적용되지 않고, 관측자의 의식이 단 하나의 결과만 인식하도록 만드는 색다른 과정이 진행된다. 의식이 양자역학적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여러 개의 가능성 중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현실에서 (또는 적어도 관찰자의 의식에서) 지워지는 것이다. 꽤 그럴 듯한 가설이다. 양자역학은 신비롭고, 의식도 그에 못지않게 신비롭다. 이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거나, 동일한 미스터리이거나, 또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해결한다고 상상해 보라. 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일인가! 그러나 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양자물리학을 연구해 오면서 나의 오래된 믿음을 흔들 만한 수학적 논리나 실험 결과를 마주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다시 말해서, 두 미스터리가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는 이야기다. 양자계가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으면 양자적 확률 구름이 걷히면서 명확한 하나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지난 세월 동안 실행된 수많은 실험이 이 관점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 따라서 명확한 하나의 현실이 나타나는 것은 의식이 아닌 상호작용 때문이다. 물론 이것을 증명하거나 반증하려면 의식이 개입되어야 한다. 나의 의식이 개입되지 않으면 결과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자적 과정에서 의식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명백하게 다른 두 미스터리의 피상적 구별을 뛰어넘은 정교한 접근법에서도 양자 세계와 의식의 연결 관계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육체와 두뇌를 포함한 모든 기능의 저변에 깔린 미시물리학적 과정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의식도 언젠가는 양자역학의 범주 안에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의식을 도입해도 딱히 놀라운 점이 없다면 의식을 고려한 방정식은 미래의 양자역학 교과서에 실리지 않을 것이다. 의식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대하지만, 미래에는 양자적 우주에서 또 다른 물리량으로 부각될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자율적인 존재로서 자유의지를 갖고 있으며, 스스로를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나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에 대해 철학자들은 많은 영감을 갖게 되었다. 이 세상에 오고가는 것이 신의 뜻이나 물리법칙에 좌우된다면 우리의 자유의지는 어디서 온 걸까? 자유의지라는 것이 존재하긴 하는 걸까? 세상사에 신의 개입을 거부했던 에피쿠로스는 과학의 결정론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막고 있다며 장탄식을 내뱉었다. 신이 모든 권세와 권위를 독점하고 있다면 경건한 마음으로 신을 섬기는 인간에게 최소한의 자유가 보상으로 주어질텐데, 아첨이나 아부에 둔감한 자연의 법칙은 인정사정이 없다. 에피쿠로스는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원자가 가끔 법칙을 무시하고 무작위로 움직이면서 이미 결정된 미래를 피해간다고 생각했다. 이정도면 꽤 창의적인 발상이지만, 자연 법칙에 임의성을 추가하여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 있는 설명이 아니었다. 그 후 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인간의 자유의지는 성 오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 토머스 홉스,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 데이비드 휴, 이마누엘 칸트, 존 로크 등 당대 최고의 철학자들을 무던히도 괴롭혀 왔다.
자유의지라는 개념을 난처하게 만드는 현대식 버전의 논리가 하나 있다. 물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어디까지나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는 입자의 집합일 뿐이다. 우리가 내리는 모든 선택은 두뇌를 가로지르는 입자들이 낳은 결과이며, 우리의 행동은 몸을 구성하는 입자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나타난 결과다. 모든 입자의 운동은 수학으로 서술되는 물리 법칙을 따른다. 엄밀히 보면 이 결정론적 운명은 우주의 출발점인 빅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모든 입자는 빅뱅과 함께 탄생했고,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는 물리 법칙이 입자의 거동을 지배하면서 모든 만물의 구조와 기능이 결정되었다. 우리의 개성, 가치, 자존감을 타협없는 물리 법칙이 낳은 결과라면 자유 의지는 발 디딜 곳이 없어진다. 우리는 우주의 냉혹한 법칙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장난감에 불과한 것과 같다.
그렇다면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생각도, 감정도 없는 입자의 횡포 속에서 자유의지가 살아남을 방법은 없을까? 많은 철학자들이 탈출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해왔고 그들 중에는 자유의지를 위해 환원주의적 관점을 포기한 사람도 있었다. 물론 사람을 구성하는 모든 입자의 거동을 수학적으로 분석하여 미래의 거동을 예측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다. 이런 계산은 우리의 계산 능력을 한참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사는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법칙을 알아내는 것이다. 수많은 입자로 이뤄진 계는 예상 밖의 현상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지금까지 수집된 증거에 의하며 이론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물리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수학계산이 너무 어렵고 복잡해서 실행하지 못하는 것 뿐이다. 우리의 몸과 두뇌를 구성하는 입자들이 무생물에 적용되는 법칙을 초월하여 의외의 기능을 발휘하면 좋겠지만 이런 희망사항은 오랜 세월 쌓아온 과학적 지식에 위배된다.
양자역학을 지지하는 과학자들도 많다. 다들 아시다시피 고전물리학은 결정론을 강하게 지지하는 이론이다. 모든 순간 입자의 위치와 속도가 결정된다는데 자유의지가 발붙일 틈은 없다. 반면, 양자물리학의 방정식은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명확하게 예측하지 않고 발생할 확률만 예측한다. 정교한 이론에 확률이 추가되었으니, 결정론의 고삐가 느슨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양자역학의 슈뢰딩거 방정식은 뉴턴의 고전물리학 못지않게 결정론적이다. 둘 사이의 차이점이라곤 예측된 결과의 가짓수뿐이다. 이 세상의 상태를 뉴턴역학에 대입하면 하나의 명확한 미래 상태가 출력되는 반면 양자역학에 동일한 정보를 대입하면 수많은 미래가 예견된다.
일부 과학자들은 양자역학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은 관측문제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확률적 서술에 관측이 개입되는 순간 하나의 명확한 현실로 돌변하는 과정은 아직도 미지로 남아있다. 실제로 우리가 전자를 관측하면 결과가 무작위로 나타나며, 무작위라는 것은 자유의지가 개입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자유의지가 개입되었다면 통계적 관점에서 볼 때 수학의 지배를 받지 않아야 하는데, 실제로 관측해보면 수학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양자적 확률에서 하나의 명확한 현실로 변하는 과정을 모른다 해도, 이 과정은 자유의지와 무관하다. 물리법칙이 결정론적인지(고전물리), 또는 확률적인지(양자물리)에 따라 현실이 전개되는 방식과 예측 가능한 내용은 크게 달라지겠지만, 자유의지에 관한 한 두 가지는 별 차이가 없다. 인간의 손으로 이뤄진 입력이 부족해도 기본 법칙이 계속 작동하고, 인간의 몸과 두뇌의 입자에도 똑같은 법칙이 적용되는 한, 자유의지가 설 자리가 없다.
지금까지 언급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우리는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는 입자로 이뤄져 있으며, 우리가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은 입자의 운동에 기인한 현상이다. 당신과 내가 만나 서로 손을 잡으면 당신의 손을 구성하는 입자들이 내 손의 입자들을 위아래로 흔들면서 악수라는 행위를 만들어낸다. 모든 입자들이 수학적 법칙을 따른다는 것은 이론과 실험을 통해서 확실하게 입증된 사실이다. 우리는 자연의 가장 기본적인 단계에서 작용하는 법칙을 직접 볼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선택이 자유의지를 발휘한 결과라고 믿는다. 인간의 무딘 감각으로는 입자 세계에 적용되는 법칙을 느낄 수 없다. 그래서 우리 몸의 입자들이 행동을 취하면 그들의 집합적인 움직임이 마치 나의 자유의지를 통해 발현된 것처럼 보인다.
만일 당신이 차도를 건너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근데 급가속한 차가 당신에게 다가오자 나는 당신을 밀쳐 당신을 구해냈다. 내 몸을 구성하는 입자와 일반적인 자동차를 구성하는 입자는 동일한 물리 법칙을 따른다. 즉 나와 차 사이에는 자유의지를 발휘할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특별한 이유는 내부의 복잡한 배열이 다양한 행동을 낳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유의지를 평가할 때 궁극적인 원인에서 인간의 다양한 반응으로 관심을 돌리면 훨씬 많은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자유의지는 우리의 통제 영역을 벗어난 물리 법칙에서 온게 아니다. 우리의 자유는 다른 입자 집단에서는 볼 수 없는 행동을 만들어 낸다. 인간의 자유는 의지가 반영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까지 과학이 알아낸 바에 의하면 자연이 전개되는 방식은 의지와 무관하다. 인간의 자유는 오랜 세월 동안 무생물을 소극적으로 대응에 가둬 왔던 족쇄가 풀리면서 주어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자유의지가 없어도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내 몸을 구성하는 입자에 물리 법칙이 적용된 결과이며 우리는 이것을 결코 바꿀 수 없다. 입자들이 양자역학의 규칙에 따라 움직이면서 나타난 결과지만, 그렇다고 현실에 대한 우리의 느낌이 퇴색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자유로운 것은 물리 법칙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거대한 내부 조직이 나로 하여금 자유롭게 반응을 보일 수 있도록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개념의 자유의지를 포기하면 우리가 보유한 가치의 대부분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지각이 있는 모든 존재를 포함하여 자연의 운영방식이 오로지 물리법칙에 의해서만 좌우된다면 우리의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물리학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학습과 창조성처럼 우리가 커다란 가치를 부여해온 것들은 대체 무슨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로봇 청소기는 자유의지가 없다. 자유의지가 없음에도 계단, 가구 피하기 테이블 다리 피해서 청소하기 등 학습능력과 창의성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의 몸 안에 내장된 소프트웨어는 로봇청소기보다 정교하여 기계와는 다른 수준의 학습능력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입자들은 매 순간마다 특별한 형태로 배열되어 있으며, 내부 또는 외부에서 새로운 경험을 쌓을 때마다 배열 상태가 조금씩 달라지면서 소프트웨어가 업데이트되어 행후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번뜩이는 아이디어, 영웅적인 행동, 엉뚱한 실수등 우리의 몸속의 입자 배열이 바뀌면서 나타난 결과다. 입자 규모에서 볼 때, 이것이 바로 학습이며, 결과가 참신하면 입자의 배열이 창의력을 낳은 셈이다.
이것은 우리의 핵심 주제중 하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현실의 다양한 층을 개별적으로 설명하면서 이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현실 세계의 전개 방식을 입자 규모에서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우리의 여정은 학습 능력과 창의력과 같은 개념을 다룰 기회도 없이 끝날 것이다. 우리를 입자의 집합으로 간주한 환원주의적 서술도 중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없다. 우리가 동일한 물리 법칙을 따르는 동일한 입자로 이뤄져 있지만, 우리의 삶은 거시 규모의 이야기에 담겨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언어로 쓰인 이야기는 입자규모에서 서술된 환원주의적 이야기와 양립할 수 있어야 한다. 거시적인 규모의 서술에서는 우리의 행동이 중요하고 우리의 선택이 미래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결정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불변의 물리 법칙으로 운영되는 미시 세계에도 당연히 그렇다. 이곳에서도 우리의 행동과 생각, 결정은 당연히 중요하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물리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로 이어진 거시적 사건들은 다분히 현실적이어서 생각과 반응, 그리고 행동이 핵심적 역할을 한다. 이들은 물리적 사건을 사슬처럼 이어주는 연결 고리로서, 한 번 작동할 때마다 뚜렷한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과 직관만으로는 생각과 반응, 그리고 행동이 물리 법칙을 통해 먼저 일어난 선행 사건의 결과라는 것을 깨닫기 쉽지 않다.
책임의 역할도 중요하다. 내 몸의 입자와 나의 행동이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해도, 나는 문자 그대로 나다. 나의 행동에 대한 책임 소재를 따지는 방식이 다소 낯설긴 해도, 나의 정체성은 달라지지 않는다. 임의의 순간에 나는 입자의 집합이며, 입자의 특별한 배열을 나타낸 약칭이다. 그러므로 나를 구성하는 입자의 행동이 곧 나의 행동이다. 그 저변에서 물리 법칙이 나의 입자를 제어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의 행동(입자의 거동)은 자유의지와 무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특별한 입자 배열은 나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반응한다라는 거시적 서술이 퇴색되지는 않는다. 우리의 행동과 반응, 생각이 나와 다른 이유는 입자의 배열 상태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나의 입자 배열은 나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배우고, 종합하고, 상호 작용하고, 반응하면서 나의 개성을 나에게 각인시키고, 내가 취하는 모든 행동에 책임을 부과하고 있다.
하나의 자극에 대하여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거의 무한대에 가까울 정도로 다양하다.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의 이야기를 이끌어온 핵심원리(엔트로피 2단계 과정과 진화)가 사실임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다. 엔트로피 2단계 과정은 모든 것이 무질서를 향해 나아가는 세상에서 질서 정연한 입자 덩어리(항성)가 형성될 수 있는지, 그리고 이 덩어리가 수십억 년 동안 엄청난 양의 열과 빛을 방출하면서 어떻게 안정화되었는지 설명해준다. 그리고 진화는 별 덕분에 따뜻한 환경이 조성된 환경에서 여러 개의 입자들이 한데 뭉쳐 복잡한 행동을 구현하고, 복제하고, 복구하고, 외부에서 에너지 대사를 진행하고 이동하고 성장해온 비결을 설명한다. 입자 집단 중에서 생각하고, 배우고, 소통하고, 협력하고, 상상하고 예측하는 능력을 습득한 집단은 생존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여 자신의 능력과 비슷한 집단을 양산하고, 세대가 반복될 수록 능력이 향상된다. 입자 집단은 개개의 입자를 지배하는 법칙 대신, 복잡하고 다양한 거시적 행동에 초점을 맞춰서 자신의 능력을 재평가 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방향을 전환하면 입자 집단은 내 의지로 이룬 것 같으면서도 결코 물리 법칙을 벗어난 적이 없는 놀라운 행동과 경험을 후대에 전할 수 있다. 이 내용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 우리는 우리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은 정연한 논리가 아닌 친숙함에 기초한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두뇌를 통과하는 입자의 속성이 조금만 변해도 친숙한 정도는 크게 달라진다. 이것은 다양한 실험을 통해서 입증된 사실이다. 두뇌 속에서 힘의 균형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나를 나라고 느끼는 감각과 내가 가진 능력, 그리고 내가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유의지, 이 모든 것이 내 머릿속에서 움직이는 입자로부터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입자의 배열을 조금만 조작하면 나에게 친숙한 특성들이 사라진다. 일상적인 경험과 언어는 자유의지와 관련된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우리는 매 순간 무언가를 선택하여 과감하게 결정을 내린다. 이 결정에 따라 행후 행동이 달라지고, 이 행동은 나를 포함하여 나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앞에서 필자는 자유의지가 입자의 움직임으로 부터 생성된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선택과 결정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나의 선택과 결정과 행동의 궁극적인 주체는 나 자신이며, 나의 자유의지가 발현되는 과정은 물리법칙을 초월한다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버려야 한다. 자유의지에 대한 느낌은 다분히 현실적이지만, 자유의지를 발휘하는 능력은 그렇지 않다. 자유의지를 이렇게 재해석하면 인간 수준의 이야기는 환원주의적 설명이 양립할 수 있다. 그리고 궁극적인 기원에서 자유로운 행동으로 초점을 바꾸면 확고하고 다양한 인간의 자유를 수용할 수 있다.
우리의 의식이 언제 탄생했는지, 자기 성찰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또는 우리가 자유의지를 언제부터 느꼈는지는 분명치 않다. 고고학적 증거에 우리의 조상들은 약 10만 년 전부터 이런 경험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인류는 이보다 훨씬 전부터 두 발로 일어서서 세상을 둘러보며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이 능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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