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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엔드 오브 타임 part8 [본능과 창조력 : 신성함에서 숭고함으로]

by Utnapishtim 2023.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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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그린이 말하는 세상의 시작과 진화 그리고 끝

8. 본능과 창조력 : 신성함에서 숭고함으로

1824년 5월 7일, 비엔나의 케른트너토르 극장 중앙 무대에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등장해서 자신의 9번째이자 마지막 교향곡을 연주했다. 그가 무대에 서본 지도 어언 12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리니스트였던 요제프 뵘은 이날 베토벤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지휘대에 오른 그는 거의 미친 사람 같았다. 숨을 한껏 들이마시며 몸을 있는 대로 뻗었다가 곧바로 바닥에 엎어질 듯이 웅크리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마치 모든 악기를 그가 직접 연주하고 모든 노래를 혼자 부르는 것처럼, 시종일관 팔과 다리를 정신없이 흔들었다."

사실 얼마전 부터 베토벤은 이명증이 심해 짐승이 으르렁 거리는 소리가 수시로 들렸다고 한다. 계속 이명증은 악화 되었고, 공연 당일에는 거의 청력을 잃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래서 교향악단이 마지막 피날레 음을 장엄하게 마무리한 후에도 이미 박자를 놓친 베토벤은 열정적으로 팔을 휘저었고,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콘트랄토 가수가 앞으로 걸어 나와 베토벤의 옷소매를 조심스레 붙잡고 청중을 향해 돌려세웠다. 천상의 음악에 감동하여 환호성을 지르며 손수건을 흔드는 청중들, 베토벤은 조용히 눈물을 떨구었다. 필자는 베토벤이 작곡 과정에서 오직 자신의 마음으로만 들었던 소리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리라는 것을 어떻게 미리 알 수 있었는지 궁금해 했다.

신화와 종교에는 우리 조상들이 이 세상을 여럿이 함께 이해해 온 역사가 담겨 있다. 의식과 믿음이 반영된 전통은 우리에게 지금까지의 여정을 설명하고 앞으로 더 나아가도록 유도하기 위해 그에 걸맞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고, 각 개인은 본능과 창의력을 발휘하여 생존력을 높이면서 집단과 같은 길을 따라갔다. 개인의 생존도 중요하지만, 집단과 융화되어야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 여정에서 새롭고 놀라운 방식으로 일관성 있는 현실을 포착하여 문학, 예술, 음악, 그리고 과학을 창조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감각을 재정립하고 세상과 나에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전수해 온 전통이 비로소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숭고한 마음은 초월적 존재를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고, 이들의 창조적 여정은 유도나 검증을 초월한 진실을 표현함으로써 자신이 직접 겪지 않은 한 침묵을 지키는 인간의 본성에 목소리를 부여했다. 

인간의 생존 기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패턴을 인식하는 능력이다. 여러번 강조되었 듯, 우리는 패턴을 관찰하고 경험하면서 새로운 것을 배운다. 여러 번 속임수에 당하는 사람은 속는 사람이 문제일 수도 있다. 패턴에서 무언가 배우는 것은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능력으로, 진화를 통해 우리의 DNA에 각인되어 있다. 어느 날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한다면 그들의 생화학은 우리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지구인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들도 패턴 인식 능력을 통해 그들의 행성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계인은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패턴을 보고 크게 당황할 수도 있다. 지구의 예술가들은 하얀 캔버스에 특정 색상의 물감을 칠하고, 대리석 덩어리에서 특정 부위를 쪼아 내고, 공기 분자의 진동을 유발하여 특정한 소리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패턴을 보고나 들으면서 자신이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현실을 느낀다.  짧은 시간동안 마치 자신이 다른 세계로 이동한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외계인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면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지구인이 이런 창조적 작품을 감상할 때 내면에 떠오르는 느낌을 설명하면 그들은 어안이 벙벙해질 수 도 있다. 예술적 표현에 당황한 외계인은 지구인이 그런 작품을 직접 창조한다는 사실에 더욱 놀랄 것이다. 캔버스, 대리석, 점토 뭉치, 작곡가의 영감 어린 교향곡, 노래, 춤 등 모든 예술 작품은 이런 것에서 탄생한다. 지구인의 일부는 무형에서 형태를 만들어 내기 위해, 또는 침묵에서 소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깊은 사색에 잠긴다. 상상 족의 비전과 시공간의 패턴을 구현하기 위해 삶의 모든 에너지를 투여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결과물을 보고 감탄하 건, 혐오를 느끼던 아예 무시하던 그런 것은 상관없다. 그들은 결과물보다 창조 과정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음악이 없다면 삶은 오류로 남았을 것"이라고 했고,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예술이 없다면 현실은 너무나 천박하고 상스러워서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일까? 상상을 펼치는 본능이 자연선택을 통해 주어졌을까? 아님녀 그 오랜 세월 동안 생존과 번식에 별 도움되지 않는 예술에 귀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해 온 것일까?

인간이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은 번식 본능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아무런 사전 협의 없이 세상에 던져졌다. 일단 태어나면 좋건 싫건 죽는 날까지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것, 우리의 정체성이 반영된 것,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우리의 느낌이 담긴 무언가를 창조하고 가공하는 것은 정말로 의미있는 일이다. 우리들 중 대부분은 솈익스피어나 바흐, 모차르트, 반 고흐, 디킨슨, 또는 오키프와 자신을 바꿀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선뜻 나서지 않겠지만, 그들의 같은 창의력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절대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만든 작품으로 세상을 조명하고, 세상을 바꾸고, 오랜 세월 동안 변치 않는 경험을 창조한다. 꽤 낭만적인 생각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표현하는 데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지위와 평판을 높일 기회를 찾는다. 그러나 우리들 중에는 간절한 마음으로 영원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다. 키스 해링은 "예술이란 불멸을 추구하는 행위"라고 했다. 

상상 속에서 떠오른 작품을 창조하고 소비하는 것이 인류의 역사에서 최근에 추가된 습성이거나 아주 드물가 일어난 사건이었다면, 예술 작품에는 진화를 통해 획득한 인간의 보편적인 특성이 반영되지 않았을 것이다. 고고학적 증거를 비춰 볼 때, 우리 선조들이 오랜 세월동안 노래하고 춤추고 곡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하고 글을 써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다. 타인의 영혼을 일깨우거나 눈물을 자아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은 왜 생존이라는 현실적 과제를 뒤로 미뤄 놓고 상상력을 발휘하는데 귀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했을까?

섹스와 치즈 케이크 : 앞서 고대인의 스토리텔링을 추적할 때에도 비슷한 질문을 제기한 후, 비행 시뮬레이터에 비유하여 답을 찾았었다. 언어를 창의적으로 활용하면 친숙한 관점과 생소한 관점을 두루 섭렵하여, 현실 세계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상황에 더욱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다. 우리는 이야기를 하고, 듣고 만들고, 장식하면서 결말에 신경 쓰지 않고 상상 속에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이리저리 갖고 놀았다. 또한 우리는 '만일~' 로 시작하는 길을 따라 가면서 이성과 환상이 섞인 다양한 가능성을 경험했고, 상상의 세계를 자유롭게 배회하면서 생존에 도움이 되는 새롭고 민첩한 사고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주제는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추상적인 예술이므로, 모든 설명을 재검토 해야 한다. 고대인이 어렵게 이긴 전쟁담이나 흥미진진한 여행담을 통해 용기와 영웅심을 키웠다는 것은 꽤 그럴듯한 추론이다. 그러나 이들이 홍적세판 에디트 피아프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곡을 들으면서 적응력을 키웠다고 주장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원시 시대에 음악을 만들거나 듣는 것, 그림을 그리거나 춤을 추는 것과 도전을 극복하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다윈은 공작새의 꼬리에서 힌트를 얻어 타고난 예술적 감각과 적응력 사이의 관계를 설명했다. 수컷 공작의 화려하고 큰 꼬리는 포식자의 눈에 잘 뜨일 뿐 아니라, 포식자를 피해 달아날 때에도 매우 거추장 스럽다. 그런데 공작은 왜 이런 비효율적인 꼬리를 갖게 되었을까? 다윈이 제시한 답은 다음과 같다. 수컷 공작의 꼬리를 사람 뿐만 아니라 암컷 공작도 수컷의 화려한 꼬리를 좋아한다.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성적 매력을 느낀다. 따라서 수컷의 꼬리가 크고 화려할 수록 암컷과 짝짓기를 할 확률이 높아지고 여기서 태어난 새끼공작들도 부친의 꼬리를 물려받거나, 화려한 꼬리를 선호하는 모친의 성향을 이어받아 유전 전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전쟁이란 식량과 안전을 놓고 벌이는 전쟁이 아니라, 번식을 놓고 벌이는 전쟁이다. 

공작의 꼬리는 화려할수록 성적 매력이 높지만, 포식자에게 표적이 되기 쉽다. 적절한 수준의 꼬리는 생존과 번식 사이를 절묘하게 균형을 이룬다.

공작의 꼬리는 다윈이 주장했던 성선택의 대표적 사례이다. 간단히 말해서, 생명체의 외모나 습성, 또는 신체능력이 이성의 취향에 가까울수록 번식 기회가 많기 때문에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할 확률이 높아진다. 공작이 어릴 때 죽으면 번식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자연선택은 살아남은 개체를 선호한다. 그러나 오래 살면서도 이성에게 어필하지 못하여 번식에 실패하면 아무런 보람이 없다. 번식에 성공하려면 살아남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생명체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후손을 낳는 것이므로, 짝짓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유할 수 있다면 안전은 어느정도 포기할 수 있다. 그렇다고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꼬리가 크면 번식을 하기 전에 포식자에게 잡아 먹힐 확률이 높기 때문에 적정 한계를 넘지 않아야 한다. 공작이 지금도 생존한다는 것은 그들의 전략이 제대로 먹히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다른 동물에서도 찾을 수 있다. 흰수염 무희새는 이성의 시선을 끌기 위해 삐걱 대는 듯한 춤을 추고, 반딧불이는 화려한 조명 쇼를 펼치면서 상대를 최면 상태에 빠뜨린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호주와 뉴기니에 서식하는 바우어새다. 이 새의 수컷은 잔가지를 엮어서 집을 지은 후 낙엽, 조개껍질, 심지어 사람이 버린 알록달록한 사탕껍질을 모아서 집 주변을 아름답게 장식한다. 바우어새가 이토록 공을 들이는 이유는 단 하나, 암컷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다윈은 성선택 원리를 정리하여 1871년에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이라는 두 권짜리 책으로 출간하였으나, 처음에는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동물도 미적 감각을 갖고 있다는 주장이 당시 사람들에게 별로 달갑게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윈이 붉은 석양을 바라보다가 문득 시적 감상에 빠져서 새와 개구리를 떠올린 것은 물론 아니다. 그가 제안한 미적감각은 짝짓기에 초점을 맞춘 개념이었다. 그러나 학자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취향을 동물에게 적용한 것이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했다. 다윈의 진화론을 지지햇던 영국의 박물학자이자 알프레드 러셋 월리스조차도 "미적 감각은 모든 동물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갖고 있는 고유한 능력"이라며 성선택 원리를 수용하지 않았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에게 타고난 미적 감각이 없다면 그들의 화려한 외모와 짝짓기를 할 때 정성을 들여 만드는 아름답고 창의적인 구조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방법이 있긴 하다. 인간이 수컷 공작의 꼬리를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지만, 암컷 공작은 거기에서 중요한 유전 정보를 포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수컷 공작의 화려한 꼬리가 강인함과 건강의 상징이라면, 그런 수컷과 짝짓기를 하여 낳은 새끼는 아버지를 닮아 튼튼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대부분의 동물이 그렇듯이 암컷 공작은 수컷보다 새끼를 낳을 수 있는 횟수가 훨씬 적기 때문에 건강한 수컷을 선호하는 쪽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물론 화려한 외모를 유지하려면 남들보다 많은 자원을 소모하겠지만, 후손을 더 많이 낳을 수 있다면 그 정도 손실은 감수할 만하다. 수컷의 화려한 꼬리털이 강인함과 활력의 상징이라면 그런 수컷과 짝짓기를 한 암컷은 건강한 후손을 낳을 것이고, 이들은 강한 생존력을 바탕으로 유전자를 널리 퍼뜨려서 공작 세계의 대세로 자리 잡을 것이다. 성선택의 관점에서 볼 때 아름다움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아름다운 외모는 배우자의 월한 적응력을 입증하는 일종의 자격증인 셈이다.

미적 감각을 기준으로 배우자를 선택하건, 또는 신체적 조건을 보고 선택하건 간에, 이성의 특정한 외모나 행동을 선호하는 성향이 적응력을 키우는 데 정말로 도움이 되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위에 제시한 설명은 인간의 보편적인 예술 활동에도 어느 정도 적용되기 때문에, 다윈은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된 이유를 성선택 원리에서 찾았다. 그는 신체 곳곳에 피어싱을 하고 물감으로 채색하는 것이 성선택의 결과이며, 음악도 짝짓기 상대를 부르는 강력한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남들보다 노래를 잘하거나, 춤을 잘 추거나, 멋진 문신을 했거나,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는 까다로운 여자에게 선택될 확률이 높고,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은 부모를 닮아 예술적인 안목이 높을 것이므로, 여러 세대를 거치다 보면 예술적 안목이 짝짓기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된다. 예술적 재능이 뛰어한 소년이 소녀를 만나면 연인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고, 그렇게 되지 않은 소년은 혼자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이야기다. 

최근들어 미국의 심리학자 제프리 밀러와 철학자 데니스 듀턴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예술적 능력은 안목 있는 여성이 남성을 선택하는 기준"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정교하게 다듬어진 예술 작품과 창조적인 전시, 그리고 에너지 넘치는 공연은 심신이 강인하다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이런 것을 만들어 낸 자신이 생존에 필요한 재능과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는 일종의 과시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술 활동이란 재능있는 예술가들이 눈 높은 여성을 짝으로 영입하는 홍보 수단에 불과하다. 물론 이들 사이에 태어난 후손도 부모의 기질을 물려받아 훗날 짝짓기를 할 때 부모와 비슷한 전략을 펼쳤을 것이다. 인간의 예술 활동을 진화론적으로 설명한 성선택 원리는 나름대로 흥미로운 구석이 있지만, 합의보다는 논쟁을 일으키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예술적 재능이 어떻게 강인한 신체와 연결된다는 말인가? 혹시 예술적 재능이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원시적 지능이나 창조력과 관련되어 있어서, 성선택과 무관하게 자연선택에서 살아남은 것은 아닐까? 남성의 예술적 재능이 성선택의 결과라면, 여성의 예술적 재능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가장 큰 문제는 홍적세의 예술 활동과 짝을 구하는 방식이 순전히 추측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루시안 프로이트와 믹 재거는 성적인 작품과 이미지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과연 이들이 홍적세에 태어났어도 여성들에게 매력을 발산할 수 있었을까? 영문학자 브라이언 보이드는 이 모든 의문을 다음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성선택은 예술활동을 촉진한 원동력이 아니라, 부차적인 요소였다." 

인지심리학자 스티븐 핑거는 적응력과 예술의 관계를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서술하여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언어 관련 예술을 제외한 모든 예술은 패턴에 집착하는 인간의 두뇌에 주어진 영양가 없는 디저트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지지자와 반대론자들이 똑같이 인용하는 문구이기도 하다. 핑거는 예술을 치즈케이크에 비유했다. "치즈케이크는 자연에 존재하는 어떤 것과도 다른 자극적인 음식이다. 오직 우리의 쾌락 회로를 활성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자극적인 재료만 듬뿍 넣은 것이 바로 치즈케이크다. 그는 예술이 인간의 감각을 인위적으로 자극하기 위해 만들어진 창조물이라고 주장했다. 치즈케이크가 건강에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예술도 적응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화적 암시로 가득 찬 핑커의 예리한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예술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는 예술의 가치를 비하한 것이 아니라, 특정 분야에서 예술의 역할을 공정하게 평가한 것뿐이다. 고대 세계에서 우리 조상의 유전자 중 매사에 서툴고 노래도 못하는 유전자는 후대에 전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예술이 생존에 도움이 안된다."는 주장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인간이 후손을 가르치는데 필요한 생물학적 능력을 키워온 데에는 진화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적응과 생존 경쟁에서 남들보다 앞선 사람은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더 많이 전하여 우월한 인종이 대세를 이루었고, 이들의 능력은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유전자가 중요한 요인이긴 하지만 우수한 유전자가 없는 사람도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서 유전적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단, 이를 위해서 모종의 훈련을 해야 하는데, 힘든 훈련을 극복하기 위해서 일종의 미끼로 대두되는 것이 바로 즐거움이었다. 누구든지 힘든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다면 집중하기가 쉬워진다. 그리고 훈련을 통해서 생존력을 키운 사람은 번식할 확률이 높고, 이렇게 태어난 후손들도 비슷한 성향을 물려받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화 과정에서 즐거움이나 기쁨을 유발하는 행동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굳건해지는 자기 강화형 피드백 회로를 형성하게 된다. 스티븐 핑거는 언제부턴가 예술이 바로 이 피드백 회로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쾌락 중추를 자극하는 행위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즐거운 적응을 위해 탄생했던 예술이 언제부턴가 적응이라는 타이틀을 던져버리고 오직 즐거움을 창출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핑커의 관점에 따르면 예술은 정크푸드에 가까운 것이다. 핑커는 적응력과 가장 거리가 먼 예술 장르로 음악을 꼽았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음악은 고대인의 적응력을 키우기 위해 양념처럼 추가된 부산물이었는데, 지금은 사람들의 귀를 감정적으로 자극하면서 명맥을 유지하는 청각적 기생충으로 변질되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는 과거 한때 음악과 적응력의 간접적인 관계에 대한 기억이 유전자 어딘가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화성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진동수(공통 진동수의 배수)는 식별 가능한 하나의 음원을 나타낸다. 우리의 선조들 중 잘 조율된 화음에서 남들보다 더 큰 기쁨을 느꼈던 사람들은 소리에 더욱 집중하여 주변 환경에 대한 지식을 더 많이 축적했을 것이다. 그들은 향상된 인지력을 십분 활용하여 생존의 기준을 자기 입맛대로 맞춰서 삶의 질을 높였으며, 청각을 더욱 예민하게 발달시켰다. 천둥소리나 발자국소리,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등 다량의 정보가 담긴 소리에 민감해진 그들은 주변 환경을 더욱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고, 청각이 발달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오래 살아남아서 자신의 월한 생존력을 후대에 퍼뜨릴 수 있었다. 핑커는 음악이 인간의 개선된 청력에 무임승차하여 적응과 무관한 청각적 즐거움을 생산하는 쪽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했다. 치즈케이크가 고열량 음식에 집착했던 고대의 습성을 인위적으로 자극하는 것처럼, 음악은 정보를 얻기 위해 소리에 민감했던 고대의 습성을 인위적으로 자극한다는 것이다. 

핑커는 죄책감을 동반한 쾌락과 감정을 순화하는 예술 행위를 동일 선상에서 비교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반감이 끓어오르겠지만, 그의 의도는 예술의 가치를 폄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의미를 확장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행동에는 진화론으로 설명되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며, 그 흔적은 우리의 DNA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인간의 가장 고귀한 발명품 중 하나인 예술이 생존에 필요한 요소였다니, 이 얼마나 반가운 소식인가? 그러나 아쉽게도 핑커의 설명이 옳다는 보장은 없고, 생물학적 적응성만으로 가치를 판단할 수도 없다. 다만 인류가 생존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오직 상상력만으로 아름다움과 불쾌함, 그리고 비통한 감정을 표현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중요하다고 해서 반드시 적응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상상과 생존 : 예술이 환경 적응에 별 도움이 안된다고 해서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윈주의자들은 예술이 끝까지 살아남은 이유를 진화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연구를 계속했다. 이들의 목적은 예술 활동과 생존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었다. 인류학자 엘렌 디사나야크는 "인류의 역사에서 예술과 종교는 일주일에 한 번쯤 관심을 갖거나, 딱히 할 일이 없을 때 시간을 때우거나, 마음대로 거부할 수 있는 여가 활동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벽화를 그리기 위해 깊숙한 동굴 속으로 기어 들어가거나, 격렬하게 북을 치거나, 무아경에 빠져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는 등, 예술활동은 종교와 함께 고대인의 삶과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생존과 적응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 이 정도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구석기 시대에 외계인이 지구에 나타나서 호모 사피엔스를 보았다면, 이 종족이 100만년 뒤 지배종이라고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두뇌와 체력을 집단적으로 활용하여 자신보다 크고 강하고 빠르고 후각/청각/시각이 뛰어난 다른 동물들을 압도했다. 인간이 생태계 최강자가 될 수 있던 비결은 임기응변과 창의력, 사회적 생활 방식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사회화는 막강한 영향력 못지않게 복잡한 현상이어서 하나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이 집단을 이루게 된 것은 여러 요인이 복잡하게 작용한 결과다. 디사나야크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인간이 친사회적인 성향을 갖게 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예술을 꼽았다. 

너와 내가 같은 일을 하면서 상대방의 감정적 반응을 미리 예측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면 서로 협력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 바로 예술이다. 예를 들어 너와 나를 포함한 모두가 음악 행사에서 에너지 넘치는 리듬과 멜로디에 함께 열광한다면 마치 같은 공동체에 속한 듯 강한 유대감을 느낄 것이다. 예술을 매채체로 삼아 강렬한 감정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는 일종의 공동체 의식이 형성된다. 이 분야 연구의 선두 주자인 미국의 철학자 노엘 캐럴은 예술은 사람들을 문화 활동에 끌어들여서 하나로 뭉치도록 감정을 자극하고 유도하는 행위로 정의했다. 집단에 정서적으로 동화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살아남을 확률이 높으므로, 집단의 유대감은 세대가 거듭될수록 견고해진다. 

종교가 집단 유대감에서 탄생했다는 설명에 설득되지 않는 사람은 예술이 집단 유대감에서 탄생했다는 설명도 선뜻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종교를 설명할 때 그랬듯이, 굳이 집단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예술은 한 개인의 적응과 생존에도 도움이 된다. 내가 보기에는 예술과 집단의 관계보다 예술과 개인의 관계가 훨씬 중요한 것 같다. 예술은 개인의 신체적 한계나 일상적인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무한정 펼칠 수 있는 상상의 장을 제공한다. 진실에 집착하는 마음으로는 무한히 펼쳐진 가능성의 세계에서 극히 일부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데 익숙해진 마음은 상투적인 생각과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유연한 사고를 펼칠 수 있다. 창의적 사고와 혁시은 주로 이런 마음에서 탄생한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과학 기술이 지금처럼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유연한 사고를 펼친 과학자들 덕분이다. 그들은 이전 세대 과학자들이 풀지 못한 난제를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봄으로써 과학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발견을 이루어 냈다. 

그 유명한 상대성이론은 새로운 실험이나 데이터에서 출발한 이론이 아니었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이미 잘 알려진 전자기학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던 중이었다. 뉴턴의 고전물리학에 의하면 시간과 공간은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양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빛의 속도는 광원의 속도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과연 그럴까? 바로 여기서 아인슈타인 특유의 상상력이 발동하기 시작한다. 혹시 빛의 속도가 항상 일정하고, 시간과 공간이 수시로 변하는 것은 아닐까? 이 논제는 과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론이 상상력과 창의력의 산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구축한 상대성이론과 높은 수준의 창조적 예술 활동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캐나다 출신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바흐의 음악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의 선율은 전치와 반전, 역행을 정신없이 반복하면서도 새롭고 완벽한 하모니를 창출한다. 이것이 바로 바흐가 천재임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다." 아인슈타인의 천재성도 이와 비슷하다. 그는 기존의 이론을 쌓아 올린 벽돌을 낱낱이 해체한 후, 새로운 개념이 적용된 청사진을 토대로 처음부터 다시 쌓아올렸다. 흥미로운 점은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연구 과정을 종종 음악에 비유했다는 점이다. 그는 가끔 방정식과 수학 기호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상대성이론이 지배하는 우주의 영상을 머릿속에 그려 보곤 했다. 우주의 리듬을 듣고 패턴을 상상하면서 현실 깊은 곳에 숨어 있는 통일성을 찾아내는 것. 이것이 바로 아이슈타인이 실행했던 예술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바흐의 푸가는 생존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러나 이들이 남긴 작품은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과학적 재능이 현실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용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유사성과 은유적 표현으로 설명하고, 색과 질감으로 표현하고, 리듬과 가락으로 상상하는 능력은 인지 가능한 세계를 훨씬 넓고 풍성하게 확장시켜 준다. 인간은 지난 수십 만 년 동안 예술이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아무런 위험 요소 없이 인지력과 상상력을 함양하고, 혁신을 꾀해 왔다. 

예술은 혁신적 사고를 촉진하고 사회적 결속력을 다지는 등, 인간이 환경을 적응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혁신은 창조라는 군대의 진군을 이끄는 보병이고, 결속력은 보급부대에 해당한다. 치열한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두 부대가 모두 필요하듯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려서 성공적으로 구현하려면 창의력과 결속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요소의 연결 고리에 예술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예술이 단순한 오락을 넘어서 적응 수단으로 활용되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예술은 창조적 사고에 여념이 없는 커다란 뇌의 휴식을 위해 적응과 무관하게 고안된 부산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고대 예술에서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브라이언 보이드는 그의 저서 "이야기의 기원"에서 예술은 사회성을 키우고, 상상력을 자극하고, 스스로 개척한 삶에 자신감을 불어넣음으로써 인간과 세상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고 했다.  

나는 예술이 냉혹한 자연선택에서 자력으로 살아남았기 때문에 우리 선조들이 창의력을 연마하고, 관점을 넓히고 집단 결속력을 다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술은 언어와 이야기, 신화, 종교를 하나로 묶어서 상징적 사고력과 조건법적 추론, 자유로운 상상력, 그리고 협동 정신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이 문화적, 과학적, 기술적으로 풍부해진 것은 바로 이런 능력 때문이다. 

예술과 진실 : 필자는 뉴욕시에서 집으로 향하던 고속도로에서 개 한마리를 치었고, 그 개를 동물병원으로 바로 옮겼다. 하지만 그 개는 필자의 품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기억 속에는 그 경험이 강렬하고 끔찍하게 남아있다고 한다. 또 다른 강렬한 경험으로는 갓 태어난 첫 아이를 처음 품에 안았을 때라고 힜다. 그리고 몇 달 동안 풀리지 않던 방정식이 풀리던 순간, 네팔인이 세상을 떠단 가족의 시신을 불태우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을 때 등 이런 경험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이처럼 강렬한 예술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정화시킨다. 이 경험은 돌부리에 채였을 때 발가락에 느껴지는 통증만큼이나 현실적이다. 우리는 예술을 통해 진실에 다가가고, 나와 진실의 관계는 예술을 통해 더욱 확고해진다. 다른 사람들과 토론하고, 분석하고, 해석하면 이런 경험을 좀 더 체계화 시킬 수 있지만, 오직 나 혼자 겪었던 강렬한 느낌은 언어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심지어 언어에 기초한 예술(시, 에세이, 소설 등)도 가장 강렬하게 남는 것은 문자가 아니라 이미지와 감동이다. 미국의 시인 제인 허시필드는 "새로운 이미지에 적절한 어휘를 구사하면 존재의 폭이 확장된다."고 했고,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솔 벨로는 인식의 폭을 확장시키는 예술 특유의 능력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진실의 겉모습일 뿐이다. 오직 예술만이 자부심, 열정, 지성, 습관을 초월하여 보이지 않는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또 하나의 진실이자 진정한 진실이다. 예술이 없다면 진정한 진실이 우리에게 던지는 힌트를 포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존재는 실용적인 언어로 번역될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삶의 일부라고 오해할 것이다."

인간의 생존 여부는 주변에서 수집한 정보의 정확성에 달려 있다. 그리고 주변 환경을 통제하는 능력을 키우려면 자신이 가진 정보가 실제 자연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구체적으로 알아야 한다. 이런 것은 실용적인 목적을 이루는 데 필요한 원료로서,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객관적 진실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인간의 모든 경험을 설명할 수는 없으며, 실용적 지식이 닿지 않는 곳에 예술적 진실이 존재한다. 폴란드 출신의 영국 작가 조지프 콘래드(1857~1924)는 예술적 진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것은 지식을 초월한 높은 수준의 이야기르서 기쁘거나 슬플 때, 꿈을 꿀 때, 무언가를 간절히 바랄 때, 환상에 빠졌을 때, 희망을 품었을 때, 또는 고통을 느낄 때, 행복, 경이감, 연민, 아름다움, 고통, 그리고 모든 창조물에 대한 동료 의식과 함께 찾아와...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어준다. 죽은 자와 산 자, 그리고 산 자와 아직 태어나지 않는 자들이 예술적 진실을 통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경직된 믿음에서 벗어나 수천 년에 걸쳐 개발되어 온 창조적 본능은 콘래드가 말한 감정의 세계를 누비면서 솔 벨로가 말한 진정한 진실의 속상임을 들었다. 특히 글을 쓰는 작가들은 주인공을 통해 인간사를 조명하는 가상의 세계를 창출하여, 독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했다. 시각과 청각에 기초한 예술도 마찬가지다. 음악과 미술은 콘래드의 말대로 "지식을 초월한 곳에서" 감정을 사정없이 자극한다. 벨로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을 이야기하고, 프란츠 리스트의 죽음의 춤은 본능적인 육감을 자극한다. 또한 브람스의 교향곡 3번은 이루어지지 않은 소망을 떠올리게 하고, 바흐의 샤콘느는 숭고함의 극칭이며, 베토벤 교향곡 9번의 환희의 송가에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희망적인 메세지가 담겨 있다. 가사가 있는 곡으로 레너드 코언의 할렐루야는 더할 나위 없는 진정함으로 불완전한 삶을 찬양하고, 주디 갈랜드의 무지개 너머는 어린 시절을 동경하는 순수한 마음이 담겨있으며, 존 레논의 이매진은 이상적인 세상을 그리며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한 메세지를 전달한다. 

누구나 인생에서 잊지 못할 순간이 있듯이,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을 받은 책이나 영화, 안무, 그림, 또는 음악이 있다. 우리는 이런 매혹적인 경험을 통해 삶의 본질적인 특성을 과도하게 소비하고 있지만, 일상적인 삶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통찰력을 제공하므로 영양가 없는 음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필자는 이프 하버그의 표현 "노래를 들으면 생각을 느낀다." 라는 글에서 예술적 진실이 담겨있다고 말했다. 생각은 지적인 행동이고 느낌은 감정적이지만 생각을 느끼는 것은 예술적 과정이다. 이것은 언어와 음악을 연결하는 능력에 좌우되지만, 여러 가지 예술이 하나로 결합되어 다양한 감정을 자극한다. 모든 예술은 우리에게 생각을 느끼게 함으로써, 의식적인 사고나 사실에 입각한 분석으로는 알 수 없는 다양한 진실을 마주하게 해 준다. 그것은 지식이나 지혜를 초월한 진실로서 논리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증명할 필요도 없다. 

단, 오해는 금물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입자의 집합이며, 모든 입자의 상호 작용과 거동 방식은 물리학으로 거의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입자에 기초한 설명으로는 사고와 지각, 감정 등으로 이뤄지 정신 세계의 극히 일부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생각과 감정이 섞여서 생각을 느끼고 느낌을 생각할 때, 우리는 과학으로 서술할 수 없는 초월적 세계로 들어간다.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주장대로, 이것은 축하해야 할 일이다. 그는 오직 예술을 통해서만 다른 사람의 비밀스런 우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별과 별 사이를 오가는 진정한 여행이다. 의식이 개입된 직접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이런 여행을 떠날 수 없다." 

필자는 프루이트의 관점이 현대물리학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물리학자들은 수학 이론과 실험 장비로 눈의 성능을 개선하여 과거에 그 존재조차 몰랐던 세계를 발견했고 이미 알고 있던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여 여러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새로 발명한 도구로 오랜 세월 동안 우리가 살아온 곳을 열심히 뒤지다가 생각지도 못한 영역을 발견했다. 과학의 힘을 좀 더 일반적으로 활용하려면 확고한 지침에 따라 세포와 분자의 집합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 외에 다분히 인간적인 진실은 예술의 영역에 속한다.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싶을 때는 거울을 보고, 자신의 영혼을 보고 싶다면 예술 작품을 보라." 1925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이다.

시적인 불멸 : 필자는 주변사람들로부터 이 우주에서 가장 황당하고 신기한 현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항상 그 대답은 바뀐다며 시간의 유연성을 알 수 있는 상대성 이론을 대답하기도 하며, 또한 양자 얽힘을 떠올리기도 한다고 했다. 또한 가끔 초등학교 때 배웠던 아주 단순한 사실을 대답할 때도 있다고 했다. 이는 수만, 수억년 전 별에서 방출한 빛을 성능 좋은 망원경을 바라볼 때이다. 이들 중에는 오래전에 수명을 다하여 변화된 별도 있을 수 있고, 지금은 먼지가 되어 없어진 별들도 있다. 빛은 물체가 현존한다는 증거가 아니라, 한 때 그곳에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흔적일 뿐이다. 우리의 몸에서 방출되거나 반사된 빛 중 일부는 아무런 방해없이 지구 탈출에 성공해서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방대한 우주로 나아가고 있다. 시적인 불멸이 우주 공간을 광속으로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다. 

지구에는 또 다른 형태의 시적 불멸이 존재한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 오래 살고 싶다는 욕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이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상상의 세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창의적인 마음은 불멸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고 영원을 굽이쳐 흐를 수 있으며, 끝없는 시간을 추구하거나, 경멸하거나, 두려워하는 이유를 깊이 사색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수천 년 동안 예술가들이 해온 일이다. 

2500여년 전, 그리스의 서정시인 사포는 변하는 세상을 한탄하며 시를 읊었다. 사포의 애절한 시는 에로스는 나에게 태양과 같은 아름다움과 광채를 주었다는 구절로 마무리된다. 항상 열정적인 삶을 추구하면서 영원히 빛을 발하기를 원했던 그녀는 시를 통해서 상징적인 불멸에 도달했다. 이것이 언젠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 영웅적인 행동과 공헌, 그리고 창조적인 작업을 통해 죽음을 부인해 왔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다. 불멸의 기준은 영원에서 문명 존속 기간까지, 인간적인 조정이 필요하다. 불멸의 존재가 되려면 엄청난 대가를 치뤄야 하지만, 상징적인 불멸은 문자를 통한 불멸과 달리 실제적이다. 문제는 방법이다. 사람들이 과연 어떤 삶을 기억해 줄 것 인가? 어떤 예술 작품이 오래 살아남는가? 우리의 삶과 작품이 그들과 함께하려면 어떤 조건을 만족해야 하는가?

사포가 절벽에서 투신하고 약 2천 년이 지난 후,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세상이 기억하는 예술과 예술가의 역할을 깊이 생각하다가 묘비에 새길 글귀를 주제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내가 죽으면 이 세상 모든 것이 함께 죽겠지만 / 그대의 이름은 나의 글을 통해 불멸의 존재가 되리라 / 이 세상의 모든 숨결이 죽은 후에도 / 너의 펜에는 그러한 힘이 있나니, 그대는 영원히 살리라. 후세 사람들이 읽고 암송하는 것은 죽은 자가 남긴 말이 아니라 시인이 남긴 글이기 때문에, 묘비문은 시인이 상징적으로나마 불멸을 누리는 수단이다. 실제로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셰익스피어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정신분석가 오토 랭크는 프로이트의 비엔나서클을 떠난 후 '상징적인 불멸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 행동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란 주제로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예술적 행동이란 '자신의 운명을 책임지고, 현실을 바꿀 용기를 갖고, 자신만의 자아를 형성하는 평생 작업에 몰두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예술가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영원을 향한 갈망을 창조적인 작품으로 구현한다. 이 관점은 예술가의 고통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는 것으로 랭크의 주장에 의하면 예술을 창조함으로써 죽음에 대항하는 것이야말로 죽음을 극복하는 올바른 길이라 했다. 미국의 작가이자 평론가인 조지프 우드 클루치는 "열망으로 가득 찬 역사가 말해 주듯이, 인간은 끊임없이 영원을 갈구해 왔다. 그러나 우리가 구현할 수 있는 영원함이란 예술을 통한 영원뿐이다." 라고 했다. 

이런 동력이 수만 년 전에도 존재했다면 생존을 위한 행위 말고 다른 활동에 에너지를 쏟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나? 수천 년에 걸친 인류의 문화사에서 다른 모든 것을 제치고 예술적 추구가 핵심을 이루게 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가? 필자는 그렇다고 한다. 예술에 대한 랭크의 포괄적 관점이 맞건 틀리건 간에, 단명한 삶을 인지한 우리 조상들은 상징적이면서 오래 지속되는 자신만의 흔적을 세상에 남기고 싶어 했다. 또한 그들은 오직 생존에만 집중해 온 삶을 잠시 접어두고 마음에서 우러나온 예술 활동에 참여하거나 작품을 감상하면서 함께 기쁨을 나누고 삶의 의미를 찾았을 것이다. 

고대 예술이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은 증거 부족으로 분석이 쉽지 않으나,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필멸과 영원함이 반영된 예술 작품을 수시로 접하고 있다.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먼은 죽음을 최후로 간주하지 않았다. "당신은 죽음을 의심하는가? 내가 죽음을 의심한다면 지금 당장 죽어야 한다. / 내가 사멸을 향해 즐거운 마음으로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 / 장담하건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불멸 뿐이다!" 이처럼 시인/예술가들은 육체는 필멸적이고 존속 기간이 짧은 반면, 예술은 불멸적이면서 영원함이 있다고 말한다. 

러시아의 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의 등장 인물인 아르카디 스비디리가일로프를 통해 영원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영원이라고 하면 대부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규모를 떠올린다. 정말 거대하다! 왜 항상 그래야만 하는가? 허름한 시골집의 욕실을 상상해보라. 곳곳에 검은 얼굴이 묻어 있고 구석마다 거미가 득실거리는 지저분한 욕실... 바로 그런 곳에 영원이 존재한다. 내가 생각하는 영원은 이런 것이다." 미국의 시인 실비아 플라스는 이 정서를 좀 더 감정적으로 표현했다. "오, 신이여, 저는 당신과 같지 않습니다 / 당신의 공허한 어둠 / 그곳에 종잇조각처럼 빛나는 판에 박힌 별들 / 나는 영원이 지루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원치 않습니다."

위에 열거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한정된 시간밖에 인지할 수 없는 우리는 예술을 통해 영원이라는 개념을 끊임없이 추구해 왔다. 삶을 성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죽음도 성찰하게 된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죽음을 성찰하면서 죽음의 위력에 도전하고, 죽음의 필연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죽음을 초월한 세계를 상상했다. 학자들이 예술의 진화적 유용성과 사회 결속에 공헌한 정도, 그리고 고대인의 삶에 미친 영향을 아무리 열심히 파헤쳐도,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삶과 죽음, 유한과 무한 등)을 표현하는 가장 획기적인 방법이 예술이라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강렬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예술은 단연 음악이다. 음악은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서, 단 몇 초 만에 듣는 사람을 시간을 초월한 세계로 데려다 준다. 첼리스트이자 지휘자인 파블로 카살스는 '평범한 행동에 열정을 부여하고, 일시적인 것에 영원을 달아주는 것은 음악의 힘'이라고 했다. 우리는 음악을 통해 더 큰 무언가의 일부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조지프 콘래드는 이를 두고 '외로운 마음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막강한 힘'이라고 했다. 음악은 듣는 사람과 작곡가, 또는 함께 듣는 친구나 집단을 하나로 연결해 주고, 우리는 이 연결을 통해 잠시나마 시간을 초월할 수 있다. 

1960년대 말 맨해튼의 한 초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저버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숙제를 내주었다. 어른 한 사람을 골라서 직업을 물어보고 그런 일을 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 인터뷰해서 보고서를 제출하란 것이었다. 그 때 필자는 큰 고민없이 아버지를 인터뷰 했다. 

그는 "아버지는 왜 남들 다 다니는 학교를 버리고 음악을 택하셨나요?" 라고 물어봤고 아버지는 "외로운 게 싫어서 그랬단다." 라고 대답했다. 필자의 아버지에게 음악은 생명줄, 그 자체였다. 콘래드가 말한 막강한 힘이 필자의 아버지에게도 작용된 것이다. 

음악은 다른 장소, 다른 시간대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깊은 유대감을 느끼게 해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 헬렌 겔러가 바로 그 증인이다. 1924년 2월 1일, 뉴욕시의 WEAF 라디오 방송국은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베토벤 9번 교향곡을 생방송으로 내보냈다. 때마침 집에서 라디오 앞에 앉아 있던 헬렌 켈러는 스피커의 진동판에 손을 얹고 불후의 명곡을 들었다. 아니, 손으로 느꼈다. 그녀의 손은 각 악기 소리를 구분할 정도로 예민했다고 한다. 

"오케스트라의 화음이 격정적으로 치닫다가 갑자기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손은 그것이 사람의 목소리임을 금방 알수 있었지요. 뒤로 갈수록 합창단은 점점 더 환희에 찬 목소리로 기쁨을 노래했고, 저는 심장이 멎는 듯한 감동에 빠져 들었습니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헬렌 켈러의 영혼을 뒤흔들면서 영원을 향해 치닫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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